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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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3

2023-10
#춘천은지금 #봄내를만나다
춘천 붓이야기박물관
붓에 관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서면 403번 지방 도로를 여러 번 오가며 보았던 ‘붓이야기박물관’ 간판.

서예가나 동양화를 그리는 작가가 들어갈 것처럼 건물 밖에는 커다란 붓이 여러 개 걸려있다.

붓 박물관이 아닌, 붓 ‘이야기’ 박물관인 이유가 있을까?


붓의 어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생각해 보니 붓글씨를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궁금증을 가득 안고 붓이야기박물관에 들어섰다.









< 박경수 필장이 제작한 '교촌필방'의 대형 붓 >








붓이야기박물관에는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휴대용 붓부터 사람 몸보다 큰 대형 붓도 전시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붓들을 보며, 과연 글씨를 쓸 수 있는 붓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누군가 다가왔다. 바로 강원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지정된 박경수 필장(붓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오시는 분마다 붓을 기계로 만드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천연모로 만드는 우리나라 전통 붓은 전부 사람 손으로 만들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 써볼 수 있는 붓은 다른 데 없어요. 대표적인 게 닭털붓인데, 비백 글씨가 나온답니다. 비백은 빗자루로 쓴 자리처럼 보이는 서체로 생동하는 필세가 있는 독특한 필획이에요. 일반 붓은 비백 글씨가 안 나오죠.” 붓에 대한 설명을 열정적으로 이어간 그는 춘천, 강원도의 유일한 필장이다. 기능 보유자로 지정받은 무형문화재 필장은 전국에 단 8명뿐이다.






무형문화재는 말 그대로 형태가 없는(무형) 문화재를 가리킨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무형의 문화적 유산.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와 문화적 기능을 지닌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기능을 후계자에게 전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강원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는 1971년 정선아리랑이 첫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현재 30여 개의 무형문화재가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 지정 번호는 지정 순서대로 부여됐지만, 가치 서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 2021년 폐지됐다. 





< 박경수 필장 >



1957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한 박경수 필장은 1974년, 18살 때부터 붓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붓의 기초를 습득하고, 여러 필장에게 기술을 배우며 붓의 세계에 빠지게 됐다. “당시엔 붓을 만드는 사람이 전국에 5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추운 지역의 동물 털이 붓 만들기엔 더 적합하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1985년 춘천에 정착해 붓을 만들어 오고 있다.” 박 필장은 춘천에 자리 잡은 후 여러 동물 털로 탄력 있고 오래 쓰기 좋은 붓을 만들기 위해 공부 를 이어갔다. 그 결과 2013년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2017년 붓이야기박물관을 열었다. 그의 두 아들 박창선, 박상현 씨도 전통 붓의 명맥을 잇기 위해 이수자가 되었다. 첫째 아들 박창선 씨는 ‘문화재 관리학’ 분야를 공부해 과거의 붓을 연구하고, 이후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지를 공부하고 있고, 둘째 아들 박상현 씨는 ‘문화재 보존과학’을 공부해 동물 털의 성분을 분석하고 보존에 적합한 환경과 온·습도를 찾아내는 등 붓을 최대한 오래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서예 붓에 가장 많이 쓰이는 동물 털은 흰 염소 털(양모필,羊毛筆)과 족제비 꼬리털(황모필, 黃毛筆)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실정이다. 박경수 필장은 글씨를 쓰는 용도 외에도 작품으로서의 붓에 관한 연구도 많이 했다. 그 대표작이 닭의 털로 만든 계모필(鷄毛筆)이다. 어느 날, 애지중지 키우던 앵무새가 죽고 나서 기리는 방법을 찾다가 깃털로 붓을 만들게 됐다. 이 깃털붓을 계기로 춘천을 대표하는 붓을 만들고 싶어 닭의 털로 붓을 만들기 시작했고, 5년간의 연구 끝에 계모필을 완성하게 됐다. 이후 첫째 아들이 고문헌에서 계모필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기도 했다. 만드는 방법이 따로 전해지진 않아, 박경수 필장만의 방식으로 복원하고 발전시켜 오고 있다.

두 번째로는 배냇머리로 만든 태모필(胎毛筆)이다. 태모필은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머리카락(일생에 한 번만 갖게 되는 단면이 없는 배냇머리)으로 만드는 붓이다. 1991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의 배냇머리로 만든 붓이 방송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의뢰가 많아졌는데, 나중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식의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만들어 준 붓이라는 걸 고문헌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 "닭털붓으로 베개 맡의 벽에다 기록하노라" - 조선후기 학자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中 








박경수 필장과 이수자인 박창선, 박상현 씨는 전통 붓 문화를 이어가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진정성과 사명감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박경수 필장은 전통 붓의 장점에 휴대성을 더한 휴대용 황모필을 만들어 특허를 냈으며, 최근 서울 이태원에 문을 연 교촌치킨 플래그십 스토어 ‘교촌필방’에 대형 붓 두 점을 제작·설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다호리 붓***인데, 이를 통해 기원전 1세기경부터 붓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미군에 의해 연필과 볼펜이 들어온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에서 2,000여 년 넘게 문자를 기록한 도구로 붓이 쓰였다는 뜻이다. 박경 수 필장은 “우리나라 전통 붓의 재료는 알다시피 동물 털이다. 그래서 같은 필기도구라도 붓과 볼펜은 다르다. 붓에는 역사가 있고, 정신이 있다. 붓으로 쓰는 글에 힘이 실리는 이유기도 하다”며 전통 붓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우리 역사를 기록한 붓과 붓을 만들기 위해 거쳤을 장인의 손길을 되새기며 붓이야기박물관에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 1988년 경상남도 창원시 다호리(茶戶里)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붓 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