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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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2

2023-09
#예술가의 일상 수집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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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이곳에 높고 하얀 건물이 있었단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던 그곳의 서점을 들러 지도를 삽니다. 여행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우리의 일정을 다시 되짚으며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한번은 짐도 풀지 않고 지도부터 펼쳐 지난 날 즐거웠던 기억을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 샀던 지도의 기호들과 이번 여행에서 만났던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공원 앞을 가로지르는 대로가 생기고, 넓은 부지의 처음 보는 건물이 생겨 있었죠. 3년 전 여행을 다녀왔던 그곳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습니다. 지난 기억 속 풍경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죠.




고요하게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곳 춘천도 지금 떠올려보면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10여년 전 이사를 오며 처음 마주했던 풍경들은 이제 거의 존재하질 않는 것 같네요. 이곳도 조용히 차츰 바뀌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도로 확장부터 오래된 시설 정비는 기본이고 오래도록 비어 있던 공터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며 계속해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풍경들이 만들어진 만큼 또 많은 것들이 사라졌죠. 




몇 주 전,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금의 망대를 볼 수 있는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기사였죠. 물론 이것이 완전 철거가 아닌, 모형이나 조형물 설치를 통해 그 역사성을 기리려는 대책도 논의가 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야트막한 약사리 고개 꼭대기에는 하얀 기둥처럼 보이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빼곡히 언덕을 덮은 주택들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죠. 고등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건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무언가 용도를 가진 하얀 건물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겼죠. ‘망대’. 우연히 인터넷에서 알게 된 그 이름은 생각보다 소박했습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위치에 홀로 솟아 있는 만큼 이름도 특별할 것이라 생각했었죠. 하긴 그 모양새에 ‘더 로얄 센트럴 타워’와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더라면 과하다 못해 기괴하단 생각이 들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김새와 용도에 적당한 이름을 가진 망대는 오랜 기간 그곳에 서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다고 합니다. 야금야금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변에 보다 높은 건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 목적이 사라져 버린 망대는 이제 그 일대를 지탱하며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죠.  




저마다 얽힌 이야기들에 흥미를 느끼고 쉽게 빠져들기 때문인지 망대에 대해 알게 된 뒤, 근처를 지날 때면 아련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며 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갔을 이들을 떠올려보곤 했죠. 이곳이 개발 등으로 인해 언젠가 사라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헛헛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곳에 살았을, 담겨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그 자리 그대로 지켜주길 바라는 작은 욕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며, 함께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다정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직도 건물 그대로 남아 있는 부모님의 신혼 단칸방을 지나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주실 때면 두 눈 반짝이며 듣던 제 모습처럼요. 




먼 훗날, 작업을 구상하며 망대마을 골목을 거닐던 26세 김수영의 그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서있을까요? 그리고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을 이의 기억 속에는 이곳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김수영

회화작가. 10여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탓에 표준어와 사투리가 섞인 억양을 쓰지만, 어엿한 15년차 춘천인.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