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검색 닫기

VOL.392

2023-09
#교실에서 보낸 편지 #봄내를품다
-
태어나 첫 일기를 쓴다는 것




2학기가 시작되면 1학년 아이들은 그림일기를 씁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순간이지요. 그동안 아이들은 남이 지어낸 이야기를 읽어왔는데 드디어 자기 이야기를 쓰는 주체적 인간으로 자랐네요! 자신의 삶과 감정을 기록하는 일은 짜릿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양육되는 동안에는 굳이 자아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부모님이 안전하고 교육적으로 설정해 놓은 무대에서 조연 배우로 자라왔다면 이제부터는 직접 무대를 창조해내고 주연 배우로 데뷔하는 셈이지요. 




일기 쓰기가 아이 내면의 성장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는 아이들은 대체로 바르고 성실합니다. 그래서 일기 쓰라는 권유를 적극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일기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어떤 감정으로 대했는지, 전지적 시점으로 보라는 의미지요. 나를 마치 다른 존재로 보는 것, 즉 타자화의 경험 말입니다. 




하지만 1학년 아이에게 이건 생소합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단 해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나의 행동을 다른 이의 시선에서 보면 옳은 행동과 나쁜 행동, 바람직한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윤리적 인간이 되는 거지요. 지금까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내 행동을 판단해 주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판단합니다. 반성적 사고의 시작이네요. 




학년이 올라가면서 일기는 공부의 기초가 됩니다. 내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면 남이 쓴 글의 독해도 쉽습니다. 대부분 정보는 문자로 되어 있잖아요. 같은 내용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독해할수록 똑똑한 사람이 되지요. 시험도 잘 보겠네요. 국가 차원에서 시행하는 시험들은 대부분 문자로 출제됩니다. 출제자의 문장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겠네요. 이렇게 좋은 일기를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흥미를 느끼고 심지어 즐거움도 느끼는 아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기가 지겹고 어려운 작업이어선 곤란합니다. 재미있는 소재를 떠올리게 해 주고(또는 경험하게 해 주고) 부담 느끼지 않을 정도의 난이도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또 일기를 쓸 때 생각이나 느낌을 쓰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부여하다 보면 일기 속 주인공인 내가 더 좋아지거든요. 




아이들이 일기 쓰는 모습을 보면 누구에게나 삶을 기록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기 검사가 아이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 등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밝힌 뒤로 예전 같은 일기 검사는 없어졌는데도 일기를 길게 쓰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동생하고 싸운 얘기를 일기에 쓴 적이 있는데 일기장에 억울한 마음을 썼더니 속이 후련해졌어요. 동생이 아직 어려서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참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 아파서 학원 빠지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난 적 있거든요. 그땐 억울해서 울었는데 일기에 쓰고 나니까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그림일기는 그림과 글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그림은 어디까지나 기억을 상세화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어제 비 왔잖아요. 동생이랑 마당에서 우산 쓰고 놀았던 걸 그렸단 말이에요. 사람 두 명이랑 우산을 그렸죠. 근데 엄마가 빗방울이 왜 없냐고, 그리라 그러잖아요. 근데 빗방울은 엄청 많아서 그리려면 손 아프다고요. 그래도 참고 그렸죠. 근데 또 싹 다 색을 칠하라 그러잖아요!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그래서 글자는 조금밖에 못 썼죠.” 


그림일기는 문자 일기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입니다. 문자가 본질이지요. 아이가 그림에 집중하느라 너무 기운을 써서 일기 쓰기가 싫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송주현 

소양초등학교 교사.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 <착한 아이 버리기>, <초등학교 상담기록부> 저자.

32년째 아이들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