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5시 30분 아직은 가족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고요함을 깨며 울리는 알람에 몸을 일으킵니다. 아파트 통로에 세워 둔 자전거를 공지천까지 끌고 갑니다. 그러곤 아무도 없는 길을 달리기 시작하죠. 집 근처에 소양강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준 덕분에 멈추지 않고 바람을 따라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변 산책로를 따라 내리 달리다 보면 수면에 아침 물안개가 조용히 피어나는 소양 5교까지 흘러가게 됩니다. 그곳에 잠시 멈춰, 일렁이며 하얗게 피어오르는 강물을 잠시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시작하죠. 몇 년 전, 조금은 불편했던 감정들을 떨쳐내기 위해 만들었던 소소한 아침 루틴이었습니다.
가끔 그런 때가 있습니다. 작업실을 나가도 캔버스 위의 손은 목적지를 잃고 멈춰버려 붓을 얹어 두고만 있는 상태.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를 반항기 넘치는 질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한 날들. 최근에도 잠시 그런 날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녁 8시,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불 꺼진 방 침대에 몸을 던져 누웠습니다. 체력적으로 딱히 지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피곤 하고 무기력한 이 느낌, 해야 할 일은 쌓여 있는데 회피하고만 있는 느낌,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어딘가 멍한 머리. 마감과 미팅 일정들이 빼곡한 책상 위의 달력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누워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옆에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이 밝아지고 벨소리가 울립니다. 친구의 전화입니다.
"뭐하고 있었어?"
"어… 그냥 누워 있었어. 해야 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건 잘 아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 생각이란 것 자체가 아예 들지를 않네."
"너 혹시… 번아웃이 온 것은 아닐까?"
걱정스런 물음에 여느 때처럼 그럴 리가 없다며 일단 부정부터 하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 의 출근 시간을 조금 넘겨서 일어나 찬찬히 작업실에서 작업이나 하는 사람은 번아웃이 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던 철저한 자기검열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가지고 조금은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니 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눈에 들기 시작했고, 평소와는 다른 몸의 신호가 느껴졌죠. 이내 친구의 말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죠.
이러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미뤄둔 일들을 일상 속 하나의 루틴으로 끌고 와 보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했던 일들을요.
요즘은 아침을 먹기 전 짧게나마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물론 평소와 같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덕 분에 매일 같은 일상도 조금은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감도 매우 높은 날들을 보내고 있죠. 이 새로운 루틴을 통해 지금의 불편한 감정을 잘 걷어낼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오래전 매일 아침의 물안개가 걷힐 때마다 부정하고팠던 그 감정들에 마주하고, 잘 걷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죠. 오늘도 한층 단단하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김수영
회화작가. 10여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탓에 표준어와 사투리가 섞인 억양을 쓰지만, 어엿한 15년차 춘천인.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