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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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91

2023-08
#교실에서 보낸 편지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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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나린이에게




고3 나린아, 2023년의 선생님이 네게 편지를 쓴다. 5년 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목표한 대학은 갔을지 정말 궁금하지? 


얼마 전 선생님한테 호되게 혼이 났지? 학기 초의 그 결심 어디 갔냐고. 야자도 빠지고, 토요일 자습도 지각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높은 대학을 바라냐고. 우린 평소답지 않게 웃음기도 없이 진지했고, 넌 눈물이 쏙 빠졌지. 하지만 괜찮아. 늘 그랬듯 씩씩하게 이겨내니까. 그날의 배움으로 다시 노력할 테니까. 


어쩌다보니 교직생활의 반 이상 고3 담임을 했는데, 아무래도 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어. 고3 담임은 모름지기 강하게 다그쳐야만 할 것 같은데, 난 너희에 대한 연민이 너무 컸거든. 너희는 어찌될지 모르는 미래에 불안해하며 늘 부족한 잠에 피로해했지. 학기별로 등급이 나뉘고, 꿈을 강요받았지. 서울에 있는 대학은 반에서 두세 명 가는 게 현실인데 어른들은 세상에 그 대학들이 전부인 줄 알지. 


난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너희에게 공부하라, 정신 차리라고 계속 이야기했어. 끊임없이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지. 야자 빠지면 혼쭐을 내주고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나도 궁금했어. 모두가 꼭 죽을 만큼 노력하며 살아야만 하는 걸까. 영국에서 온 원어민 친구는 매일 밤 11시까지 야자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Crazy(미쳤어)!”를 연발했어. 그의 나라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세계를 여행하며 세상을 배운다는데 나도 ‘크레이지’하게 부러웠단다. 


고3 첫 시간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니? 수험생활이라는 마라톤에서 넘어질 때 손 잡아주는 존재가 되겠다고. 끝없이 앞 사람을 제쳐야 하는 트랙에서, 난 넘어진 아이들에게 더 눈길이 갔어. 한 명씩 깊게 상담을 해보면 너희의 꿈은 밤하늘 별만큼 많았고, 또 빛났는데 (밤하늘을 오래보고 있으면 별이 더 많이 보이듯 너희도 자세히 살필수록 빛났어!) 꿈으로 가는 길에 잠깐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모의 고사 후 회식 자리에서 선생님들께 이런 얘기를 했지. 


“아이들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고 싶어요.” 


선배 선생님은 아직 뭘 모른다는 듯 세상은 그렇게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아. 


맞아. 나도 늘 갈등하고 방황했어. 어느 날은 대학에 만 목숨 거는 입시 전문가로 또 어느 날은 너희가 가여워 어쩌지 못하는 여린 동반자로. “공부 잘 되고 있니?”가 인사였는데, 한 학생이 편지에 이렇게 썼더라. “예전에는 요즘 무슨 책 읽는지 물어봐주셨는데, 언제부턴가 공부 잘 되는지만 물어봐주시네요.” 또 부끄러웠지 뭐야. 

EBS 비문학 과학 지문에 이런 글이 있었어. 개화를 결정하는 건 빛이 아니라 암기(暗期)라는. 환한 태양이 꽃을 피우는 줄 알았는데 어두운 밤이 개화에는 꼭 필요했던 거야. 정말 문학적이지 않니? 우린 그때 이런 글들로 위안을 얻었던 것 같아. 언젠가 꽃을 피울 거라는 믿음으로. 


그래서 나린이 너는 어떻게 되냐고? 첫 상담 때 선생님이 얼토당토않다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던 그 대학에, 넌 당당히 합격해! 축하한다! 그런데 말이야…. 3수를 한단다. 암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 매화, 금계 국, 수국… 꽃이 필 때는 저마다 때가 있듯이 기적 같던 그 목표를 넌 이루어낸단다. ‘기적은 간절히 노력한 만큼 이루어진다’ 우리 채팅방 상단에 있는 말처럼. 대학에 가서도 기쁜 일, 힘든 일 있을 때마다 연락 줘서 늘 고맙고 반갑다. 여전히 깊은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여서 기뻐. 인생은 길고 허들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걸 덕분에 다시 되새기게 돼. 그땐 눈 앞의 대학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난 여전히 불안한 미래에 신음하는 열여덟, 열아홉과 함께 하고 있어. 세상은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아. 아직도 갈등하는 선생이지만 넘어진 아이들 손 잡아주겠다는 마음은 여전해.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 한 명쯤은 괜찮겠지? 2023년의 수많은 나린아. 별처럼 빛나는 꿈은 언젠가 꽃 필거라는 걸 잊지 말자.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1




1) 박치성, 「봄이에게」 中 








김병현 

강원애니고등학교 교사. 문학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공명할 때 가장 신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