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 보자. 세계 거장 건축가의 이름이 생각나기도 하고, 멋진 건축물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 동네에 사는 건축가를 떠올려 보자. 자연스레 생각나는 이웃 건축가가 있다면 그 동네의 풍경은 무엇이 다를까. 친근한 이웃 건축가를 꿈꾸며 10년째 동네에 스며들고 있는 이준형 건축가를 만났다.
이 준 형
건축가. 1985년생 춘천 출신.
인생의 절반은 춘천에서, 나머지 절반은 타지에서 살았다.
2014년 뜻이 맞는 건축가들과 모여 ‘도시공감 협동조합 건축사무소’를 창업한 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자리 잡고 동네를 살피기 시작했다.
로컬브랜드 ‘후암연립’이란 이름으로 공간을 운영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춘천 교동의 빈집을 수리해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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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멋지고 유명한 건축가를 꿈꿨던 이준형 씨는 공부하다 보니 이 세상에는 다양한 건축가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감각적이고 화려한 건축가로 성공하는 것도 가치 있지만, 이준형 씨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끌렸다. 주변 친구들, 이웃들, 부모님이 평소 지내는 공간을 고민하고 만드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동네에 눈을 돌리게 됐다. 동네, 마을, 집 등 관심 있는 주제로 할 수 있는 걸 고민한 끝에 후암동 이름을 딴 공유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 후암연립의 공간들: 후암주방, 후암서재, 후암거실, 후암노트, 후암별채, 후암주방 제빵실, 후암별채 이누스 >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은 보통 대학교 다닐 땐 학교 근처에, 취직해서는 직장 근처에 살게 되잖아요. 주어진 환경에 맞춰 이사 다녀요. 집값도 비싸다 보니 제약도 많고요. 하지만 근사한 공간은 누구나 꿈꾸죠. 그래서 ‘내 집에 갖출 수 없는 공간이 동네에 있다면, 필요할 때 빌려 쓰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어요. 멋진 주방, 멋진 서재, 멋진 거실이 동네에 있으면 필요할 때 빌리면 되잖아요. 특별한 날 지인들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고 싶으면 공유 주방에서, 어쩌다 한 번 친구들과 모여 영화 보고 싶으면 공유 거실에서 만나는 거죠. 이런 공간이 동네 곳곳에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았고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상상한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운영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공유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하게 됐어요. 공유 공간 운영이 사업의 목적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거죠. 저희는 공유 공간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보다, 건축가로서 주민들과 ’동네를 같이 만들어 가는 것‘ 에 더 관심 있고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공간 운영 외에도 후암동의 오래된 집과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아카이빙 프로젝트도 하고 있답니다.
공간을 하나, 둘 만들다 보니 어느새 일곱 개로 늘어났어요. 저희가 운영하는 공간들과 마을에서의 활동을 하나로 묶는 브랜드가 필요해졌어요. 그래서 ‘후암연립’을 만들었죠. 각각의 공간들이 모여 하나의 집처럼 보였으면 하는 바람에 ‘연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후암연립’이라는 가상의 집에 주방, 서재, 거실, 욕실 등이 있고 이 공간들이 별도로 만들어져 마을에 수평적으로 흩뿌려져 있다고 보면 돼요.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이 후암거실에서 생일 파티를 한 적이 있어요. 건물 바로 앞이 놀이터라,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보다가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다시 들어와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리고 후암주방을 이용한 이 동네 두 가족도 기억에 남아요. 싱싱한 회를 택배로 받았다면서 두 가족이 아이들과 함께 후암주방에서 만나더라구요.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손님이 집에오면 청소해야 하고, 손님 입장에서는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뭐라도 사게 되잖아요. 그런데 함께 먹고 싶은 음식 재료를 공유 주방으로 주문해 받고, 같이 요리해 먹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도 이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 외할머니가 살던 주택을 개조해 만든 '쿡 스테이(cook stay) 어스쿠프(a soop)' >
‘청소하는 건축가’인 것 같아요. 제가 살림을 좋아하는데요. 공간을 꾸미고 집 안을 정리하고 요리하며 행복을 느껴요. 일하면서도 마찬가지예요. 공간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만든 이후에 운영하면서 계속 들여다보고 공간의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더라고요.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문득 돌아보니, 제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청소여서 그때부터 청소하는 건축가라고 말해요.
제가 교동초등학교를 나왔어요.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이기도 하고, 외가가 교동에 있어서 매일 외할머니 댁에 가서 놀았어요. 추억 많은 그 집이,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쭉 빈 집이었는데요. 춘천에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을 옛날부터 해오기도 했고 서울에서 여러 공간을 운영한 경험 덕분에 기회를 만들 수 있었어요. 지난해 1년 동안 외할머니 댁을 리모델링해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었어요. 저의 취향을 반영해 편하게 요리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에요. 주방을 가장 크게 만들고 요리에 필요한 용품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골랐답니다.
춘천은 단어만 들어도 반가운 곳이에요. 늘 가고 싶은 곳이고,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어요. 30대 초반부터 후암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한다면 춘천일 거라는 말을 하고 다녔어요. 몇 년이 지나 숙소를 만든 것처럼, 10년 후 춘천에서 제가 어떤 공간을 만들게 될지 기대돼요. 춘천에서 건축가로서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면 좋겠어요.
이준형 건축가는 후암동에서도 춘천에서도 하고 싶은 것이 아직 많다.
후암동에서는 공간을 연결해 축제도 해보고 싶고, 멤버십 서비스로 사람들이 동네에 조금 더 머물게 하고 싶다.
이제 막 하나 만들어진 게스트하우스를 시작으로 춘천에 불어올 작은 변화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