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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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4

2018.1
#봄내를 품다
춘천의 기념비 13
영세불망비
영세불망비, 벼슬아치들의 성적표

목민관(牧民官). 백성을 보살피는 벼슬아치를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급인 관찰사와 목사, 시장급인 부사 와 군수 등이 그에 해당한다. 예전에 고을을 다스리던 관료가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면 고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재임 중 베푼 치적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돌에 이름을 새겨 세웠다. 감사와 칭송의 증표인 치적비(治積碑), 송덕비(頌德碑), 선정비(善政碑)라고 부르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였다.






전통도시마다 옛 관청 앞이나 고을 입구 또는 향교, 서원 앞에 비바람에 훼손되어 가는 비석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우리 고장 춘천도 역사적이고 전통이 있는 고장이기에 당연히 이러한 비석들이 곳곳에 있다.

비석은 일반적으로 앞면에 이름을 적고 뒷면에 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다. 하지만 목민관들의 영세불망비는 대체로 행적은 기록하지 않고 앞면에 대상자의 직함과 그 아래 이름을 쓴 뒤 맨 밑에는 그 사람의 행적을 축약한 글로 마무리하고 뒷면에는 건립 시기만을 쓰는 것이 기본 형태이다.


현재 춘천에는 약 35기의 목민관비가 파악된다. 그중 대표적으로 소양로 비석군에 25기가 집중 보호되고 있으며, 소양강변 바위면에 새긴 마애비 4기, 춘천향교에 2기, 남산면 광판리에 1기, 서면 덕두원리 석파령길 입구에 1기, 천전초등학교 운동장에 2기가 있다. 소양로 비석군이 형성된 것은 옛 소양정 주변에 산재되어 있던 것을 1940년경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우리 고장 영세불망비의 주인공들은 관찰사나 부사, 군 수의 직함을 가졌던 이들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지방의 도적을 단속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영세불망비도 하나 있다. 치적이나 행적에 따라 좋은 정치를 베풀었던 이라면 선정비(善政碑)로, 교육에 힘을 쓴 이는 흥학비(興學碑), 특별히 백성을 사랑한 이는 애민비(愛民碑)라고 했고, 청렴한 목민관에게는 청덕비(淸德碑), 청백비(淸白碑), 송 덕비(頌德碑) 등을 사용했으며 두 개 이상의 단어를 합쳐 새기기도 했다.





춘천군수 장헌근 모

(춘천향교 내)

일제강점기


춘천부사 엄황 흥학비
(춘천향교 내)
 1646년

관찰사선정비 관찰사선정비

(신북읍 천전초교 내)

제작년도 미상



모두 다 그의 덕이나 공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세운 흔적이자 자취이다. 사실 처음에 이러한 비석을 세운 취지는 정말 고을 주민들이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미풍약속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치세(治世)의 상징물로 부각되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는 학정(虐政)을 일삼은 관료는 자기가 떠난 후에 비평이 두렵거나 자기의 치적을 포장하기 위해 주민들 돈을 거둬 스스로 비석을 세우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당시 백성들이 수령의 선정에 감동해서 세워진 것이 아닌 강제로 세운 비석도 있다는 말이다. 다만 춘천에 있는 선정비들의 주인공들은 학정을 일삼았거나 주민을 괴롭혀 세웠다는 기록이 아직 나타나지 않음에 다행으로 여길 만도 하겠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에는 지방관들이 한곳에 오래 머무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체로 6개월에서 2년 정도의 재임기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짧은 기간에 이룬 공적이라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나 실제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이 대부분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양로 비석군은 조선 후기 춘천에 부임했던 관리들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주로 소양강변) 것을 1940년대와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옮겨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중장비로 옮기면서 비석이 많이 훼손돼 비좌는 시멘트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애선정비 (소양1교 인근 옛 소양정 암벽)


지금은 소양로 비석군이 있는 곳을 비석거리라고 부르나 사실 춘천의 비석거리는 옛 한국은행 춘천지점(소양로 118 본동)이 있던 곳에서 서부시장까지의 큰 도로변을 말했다.


이곳에 2기의 비각(碑閣)이 존재하였는데 아랫 비각, 웃 비각으로 불렸으며, 이 비각 앞에서 춘천의 대표적 대동 민속놀이였던 기줄다리기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자취도 남지 않고 그저 구전과 간략한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명예롭기도 하지만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요즈음 뉴스를 통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권력의 무상함을 보면서 목전의 이익이나 명예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라는 교훈을 생각한다.


이제 목민관을 선택하여야 하는 시기가 도래(到來)하고 있다. 예전처럼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하기에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이들의 공약을 살피고 실천의지를 파악해 임기를 마쳤을 때 그의 이름 아래 부기할 공적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