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고 인덕션 불을 켭니다. 곧 이어 부글부글 냄비에 한 솥 가득 담긴 카레가 끓기 시작하죠. 남색 길다란 도시락에 흰 밥을 펼쳐 담고, 위에 카레를 얹습니다. 그리고 돈까스를 옆에 살짝 눌러 담습니다. 오늘 점심은 카레 돈까스입니다.
집은 춘천에, 학교와 작업실은 서울에 두고 있는 탓에 4년째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고 있습니다. 남춘천역에서 ITX를 타더라도 왕복 4시간이 넘는 여정이다 보니 매번 집이 아닌, 학교나 작업실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늘 마땅한 식당이 없거나, 근처의 음식 가격이 너무 비싼 까닭에 직접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죠.
언뜻 보기에는 매우 귀찮은 일 같아 보이지만, 덕분에 하루 일과에 새로운 루틴이 생겼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뒹굴뒹굴 보내던 시간이 약간은 분주해졌습니다. 다음날 메뉴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내일은 또 뭘 싸가나. 일단 생각이 나지 않을 때에는 냉장고부터 열어봅니다. 소비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떤 재료들이 있나. 그렇게 메인이 정해지고 나면 거기에 맞춰 함께 곁들일 반찬을 정합니다. 이어서 쌀을 씻어 안쳐 두고, 냉동실의 재료들은 미리 꺼내어 해동시키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납니다. 피로가 몰려와 조금은 힘들지만, 이후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마무리하는 하루는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기분도 듭니다.
“힘들지 않아…?”
매일 점심시간, 도시락을 꺼낼 때면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아마 춘천에서 서울로 통학이나 통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9시에 있을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밤의 찬 공기가 채 빠지지 않았을 이른 시간부터 나설 준비를 해야 하죠. 그 와중에 도시락까지 싸기 위해서는 한참을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도시락 4년차가 된 지금까지도 한두시간을 더 일찍 일어나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른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긴 하더군요. 지쳐 들어온 저녁에도 바로 잠들지 못하고 주방을 한참 서성이다 잠에 들고요. 그럼에도 저는 왜 도시락을 꾸준히 싸게 되는 걸까요?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여름 휴가를 떠날 때마다 점심은 늘 도시락이었습니다. 보통은 열무를 잔뜩 넣은 열무 비빔밥 혹은 갖은 나물들을 넣은 비빔밥이었죠. 밥 때가 되면 휴게소나, 국도의 한적한 버스정류장에 멈춰 서서는 자주색 도시락을 꺼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점심을 해결하곤 했습니다. 20여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열무 비빔밥을 먹을 때면 비를 피해 도시락을 꺼냈던 습한 공기의 그 붉은 벽돌 버스 정류장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특별히 도시락이나 어떤 요리로 대표되는 추억들이 있습니다. 소풍날 아침 엄마가 싸주신 김밥 도시락, 입시 때 학원에서 친구들과 양푼에 밥을 비벼 먹기 위해 각자 하나씩 준비했던 나물 도시락, 처음 가본 일본 여행에서 본 궁금한 맛의 도시락…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가도 그들이 스위치가 되어 우리를 잠시나마 즐거웠던 그 순간으로 보내주곤 하죠. 어쩌면 저는 매일 아침마다 평범한 일상에 타임스탬프를 찍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언젠가 되돌아봤을 때 행복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이 순간을요.
김수영
회화작가. 1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탓에 표준어와 사투리가 섞인 억양을 쓰지만, 어엿한 15년차 춘천인.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