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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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8

2023-05
#교실에서 보낸 편지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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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힘




우리 반에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가 여럿 있습니다. 가족 이야기할 때 할머니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아이들 말 속 할머니는 핵가족으로 사는 아이가 느끼는 할머니와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떨어져 살다가 명절 때만 만나는 할머니가 주로 선물, 세뱃돈, 반가움, 아이구, 내 강아지!라는 말들로 표현된다면, 할머니와 같이 사는 아이가 하는 말에는 검소하고 억척스럽고 때로는 매정하며 신산하기까지 한 할머니의 삶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쁜 부모의 일상 뒤에 남겨진 아이와 할머니가 서로의 삶을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아이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리 동네에 헌 옷 모으는 초록색 통(헌 옷 수거함)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거기서 옷을 막 꺼내 온단 말이에요. 그 옷들은 원래 어떤 아저씨들이 갖구 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막 꺼내 온다니깐요. 그 옷들이 어떤 건 크고 어떤 건 너무 작단 말이에요. 그래도 할머니가 입으라고 하면 나는 할 수 없이 입어야 한단 말이에요. 내가 할머니한테 내 옷은 새로 사 주고 할머니 옷이나 주워오지, 그러면 할머니 옷은 사람들이 잘 안 버려서 주워 올 게 없대잖아요. 글쎄. (한숨을 쉬며) 우리 할머니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전번에 엄마가 이모랑 전화할 때 할머니를 ‘우리 노인네’라 그랬어요. 그런데 할머니 있을 때는 ‘어머니’라고 그러잖아요. 그때는 할머니가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할머니가 관절이 아프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빠가 서울에서 유모차(유모차처럼 생긴 노인 보행 보조기)를 사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제 가방을 끌고 가면 하나도 안 힘들단 말이에요. 근데 제가 한 번은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학교 올 때 할머니 유모차에 싣고 왔단 말이에요. 그럼 우리 할머니는 경로당 갈 때 할 수 없이 지팡이 짚고 갔겠죠. 할머니가 다리 아팠을 거잖아요. 미안했죠. 그래서 제가 할머니한테 담부턴 안 그런다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아야(아니야), 갠잖어(괜찮아) 그랬죠. 그래도 담부턴 안 그러려고요. 할머니 또 다리 아플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도 할머니들이 얼마나 근검절약하는지 다 압니다. 그래서 헌 옷 수집통에서 옷을 꺼내 오시는 것도 알지요. 하지만 할머니의 검소함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일 만큼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니 투정을 하는 거겠지요. 그래도 그런 할머니의 행동이 '노인네'라는 표현으로 바뀔 때는 할머니 편이 되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뭉클합니다. 자기에게 보행 보조기를 빼앗긴 할머니가 화나실 텐데도 야단치는 대신 지팡이 짚고 경로당 가시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실 만큼 자신을 속 깊게 사랑하는 마음도 알아챘군요! 그래서 할머니의 존재를 감사하며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마음속으로 빕니다. 이런 마음은 아이와 할머니가 같이 살 때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몇 년 더 자라면 아이는 할머니의 '노인네'스러움 덕분에 자기가 안락하게 자랐다는 걸 알게 되겠지요? 시간이 좀 더 지나 어른이 되면 엄마 또한 할머니와 살면서 쉽지 않으셨으리라는 것도 알겠고요. 이런 마음은 책으로 가르치기 힘든 덕목입니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지금 저 아이를 키우고 있는 힘이 할머니가 살아 오신 시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가 할머니의 삶을 보며 성장하는 일. 아이에겐 축복의 시간이지요. 할머니와 같이 사는 아이에게는 그 시간의 밀도가 더 촘촘할 것 같습니다.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꿰매고 기워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결국 할머니인 셈입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과 젊은 시절을 지난 할머니의 처지는 비록 시간의 흐름이 엇갈리고 있을 뿐, 가족 안에서 서로 약자의 역할을 나누는 사이 같습니다. 2023년 가정의 달에는 우리 아이들 모두 할머니와 더 끈끈한 사랑을 나누길 바랍니다.








송주현

소양초등학교 교사.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 <착한 아이 버리기>, <초등학교 상담기록부> 저자. 32년째 아이들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