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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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8

2023-05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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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나라공화국의 동화




소남이섬 

4월 4일 이수환 사진작가와 나는 아침 일찍 남면 발산리로 향했다. 날씨는 흐려 있었다. 내일과 모레는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였다.

2월 말에 가정리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다 소남이섬을 들러볼까 하여 차를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멘트 터널을 빠져나오자 언덕이 빙판이어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꼭 소남이섬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2022년 KBS강원 지명수배를 시청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남이섬 말고 소남이섬도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40년 전 어느 노인이 말씀하시기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니까 1980년에 그 말씀을 화면에 나온 노인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소남이섬엔 남이장군의 시신을 묻은 돌무덤이 있었다는. 애석하게도 그 돌무덤은 홍수로 쓸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1919년 일제강점기 지도엔 그 지역의 지명이 또렷이 나온다. 

소남서小南嶼로 표기된 이 섬은 남이섬보다 작은 섬이어서 그렇게 붙여진 지명일 것이다. 조선조엔 남이섬을 앞섬이라 하여 남서南嶼라 했다. 두 섬 모두 반달형이다. 

남도南島가 아니고 서嶼를 붙임은, 아주 작은 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 반달돌칼 모양과도 많이 닮아있다. 

남이섬은 둥근 면이 가평 쪽으로 휘어져 있는데 반해, 소남이섬의 둥근 면은 춘천 쪽으로 휘어져 있다. 모두 춘천시 지역에 속한다. 

소남이섬이 춘천과 홍천 유역의 경계라면, 남이섬은 춘천과 가평군의 경계에 있다. 

면적 크기는 서로 다르지만, 이 반달 모양의 섬을 합치면 둥근 보름달 모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서가 남이섬으로 변하였을까. 그것은 예부터 남서에 남이장군 돌무덤이 있다는 민간전승 설화를 기록한 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저서 산수심원기와 천우기행엔 남이장군의 민간전승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남서를 남이서南怡嶼으로 부른다는 기록을 남겼다. 

남서가 남이섬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를 다산 선생이 마련한 셈이다. 

다산 정약용은 북한강을 아주 깊이, 자주 탐사하곤 했다. 그는 화천의 곡운구곡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문을 지었다.

남이섬의 돌무덤을 남이장군 묘로 조성한 해가 1965년이다. 당시 남이섬 주인 민병도가 이 돌무덤을 남이 장군의 묘로 추정하고 가묘假墓를 만들었다. 실제 남이장군의 묘는 경기도 화성에 있다. 해마다 시월이면 서울 용산 남이장군 사당에선 사당굿이 열린다.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남이섬은 홍수 때 섬이 되었다가 물이 줄면 육지가 되곤 했었다. 그것이 1944년 청평댐 건설로 하여 완전한 섬이 되었다. 

물론 소남이섬도 청평댐의 영향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 완전한 섬이 되었다. 

어쩌면 그 모양으로 보나, 전승 설화로 보나, 남이섬과 소남이섬은 쌍둥이나 다름없다. 먼저 남이섬 이야기가 있고 나중에 소남이섬 이야기가 나타난 것인데, 이 설화는 먼 훗날 또 어떤 이야기로 다시금 변모할지 지금의 우리로선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의 소남이섬은 남이섬 위의 섬으로서, 반은 숲이고 반은 황무지인 무인도로 남아있다. 그냥 조용히 ‘숨어있는 섬’이라 해야 할까. 

그럼에도 최근 이곳의 소문을 들은 이들이 하나둘 소남이섬을 찾는다고 한다. 

소남이섬 바로 위쪽으로 개인 소유의 땅이 있다.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길 초입부터 차단기로 막아놓았다. 그곳은 육지인데 장마에 물이 불어나면 소남이섬과 더불어 섬으로 변모한다. 




이수환 사진작가가 고갯마루에서 드론을 띄웠다. 드론은 흐린 하늘의 별이 된 듯이 황조롱이처럼 공중에 딱 멈추고선 눈을 빛냈다. 

언덕빼기 고갯길엔 벚나무와 귀룽나무꽃이 활짝 피었다. 연한 초록빛 산에는 드문드문 산벚꽃이 만발했고, 물길은 고요히 산자락을 받아들여 또 하나의 대칭 그림을 만들었다.

섬은 침묵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드론 촬영을 마치고 이작가가 손으로 드론을 가벼이 받으려는 순간, 날개 끝에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많이 흘렀지만 이 작가는 침착하게 드론을 땅에 안착시킨 다음, 휴지를 꺼내 손가락을 감싸고 지혈을 했다. 

곧 운전대를 잡아 강촌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응급처방을 하고 우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평 쪽으로 차를 몰았다. 

엄연히 춘천지역인 남이섬으로 가려면 경기도 가평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이섬 

평일임에도 가평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았다. 각 나라의 인종전시장 같은 느낌이 났다. 외국인 중 중국인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온통 중국어가 남이섬을 점령한 듯싶었다. 

중국인들이 비석 하나에 빙 둘러섰고, 관광안내원이 중국어로 비문을 설명하고 있었다. 남이장군의 북정시北征詩가 새겨진 돌이었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 돌은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없애네 

남아 스물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북방 여진족을 정벌하고 쓴 남이장군의 호기 어린 시이다. 

훗날 간신 유자광은 예종에게 「男兒二十未平國」에서 평平을 득得으로 고변했다. 이 한 글자의 바꿈으로 스물일곱의 남이 장군은 역적으로 몰려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남아로써 스무 살에 나라(오랑캐족)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남아로써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뀌어 역적 혐의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유자광의 음모였다. 이런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 때문에 훗날 남이장군은 최영장군과 더불어 신적인 존재로 추앙되었다. 




<남이장군 가묘>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광객들은 일명 나미나라공화국 시민이 되어 이곳저곳을 관람하기에 바쁘다. 은행나무길, 잣나무길, 메타세콰이아길 등이 동서로 쭉 뻗어 있고, 좁은 기찻길로 딩동댕댕 노란 열차가 굴뚝 연기도 피우지 않은 채 마냥 쏘다닌다. 기관사 아저씨가 앞을 내다보는 모습이 굳은 플라스틱 인형 같다. 얼마나 동화적인가. 원숭이 숲과 공작새연못, 자작나무숲 사이로 흐르는 강물, 나무정령의 숲에서 내다본 행복한 사람들의 웃음, 이 모두가 숲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벚꽃은 이미 만개하여 바람이 불면 쏴아 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린다. 연인들이 이 눈부심을 놓칠 리 없다. 흩날리는 꽃잎을 눈처럼 맞으며 그들은 사랑을 속삭인다. 




<동화그림 전시숲>




거대한 고목이 쓰러진 곳에 가보면, 뭔가 오밀조밀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다. 낙엽 더미 속에서, 썩은 원목의 부스러기 안에서 곤충들은 저마다 자기 일에 분주하다. 곤충의 세계는 또 하나의 훌륭한 민주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동화그림이다. 퍼플아일랜드상을 수상한 애니메이션 작품들과 나미 콩쿠르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한 숲광장은 나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백여 점 가까운 작품 하나하나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아이로 돌아가고픈 어른 모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남이섬은 소남이섬과 함께 반달로 강물에 떠 있다. 오래전 이 반달 모양의 섬들은 육지였고, 이곳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은 반달돌칼로 곡식을 베었을 것이다. 

현실이 고난에 부닥쳤을 때 사람들은 위안을 받으러 남이섬으로 온다. 행복한 이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남이섬을 찾는다. 가족들과 함께 쇄락하고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자 사람들은 남이섬을 방문한다. 

나는 이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걸 읽는다. *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