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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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4

2018.1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13
한류관광의 1번지 남이섬,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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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를 일컬어 ‘관광 1번지’라고들 한다. 봄내골에는 이런 강원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연간 328만 명(2016년 기준)의 내·외국인 관광객 이 북적거리는 남이섬이다. 봄내골 서쪽 맨 끝자락인 남산면 방하리의 북한강 줄기 한복판에 반달 모양으로 떠 있어 배를 타야 들 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매력에 푹 빠진 발길이 사계절 동안 끊이지 않는다. 국내 단일관광지로 외국인(연간 130만 명) 방문객 최다 관광지(전국 1위) 로 꼽히고 있다.




불모지에 싹튼 ‘국민관광지’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다. 홍수 때만 길이 막혀 섬이 되었던 곳이다. 청평댐(1944년 완공)이 세워져 상류까지 수위가 높아지면서 섬이 됐다.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하고 병조판서를 지내 다 역적으로 몰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이(南 怡·1441~1468) 장군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승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앞섬이라는 뜻으로 남섬(南島)으로 불렸다. 조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쓴 천우기행(穿 牛紀行)과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 이러한 지명 유래와 함께 일찍부터 ‘남이서(南怡嶼)’라고 한 기록이 적혀 있다. 큰 섬을 일컫는 ‘도(島)’에 비해 ‘서(嶼)’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작은 섬을 뜻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갯벌과 황무지나 다름없던 모래섬이었다. 홍수철에는 물에 잠겨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청평댐 완공으로 온전한 섬의 모습을 갖춘 해방 이후에는 고작 3가구가 터 잡고 밤나무와 땅콩, 참외, 수박 등 농사를 지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런 불모지가 수재(守齋) 민병도(閔丙燾·1916~2006) 남이섬 유원지 설립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지금부터 53년 전인 1965년이다. 금융계를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 등을 종잣돈으로 유원지 개발에 나섰다. 가장 먼저 나무를 심었다. 전 직원이 매달려 수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넓은 잔디밭도 만들었다.


남이 장군의 넋과 기상을 기리는 작업에 나서 돌무더기였던 묘역에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에는 반역죄로 처형당하면 후손들이 묘를 만드는 걸 금지하였던 터라 진묘를 지키려고 만든 가 묘였다. 노산 이은상이 추모의 글을 짓고 일중 김중현이 글씨를 써 묘역과 주변을 정성껏 가꿨다(진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위치)


당시에는 주말이나 휴가를 보낼 관광 휴양지가 전무 했던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남이섬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남이섬 개발을 ‘경춘관광주식회사’로 출범시킨 후에는 잔디밭을 골프장(9홀 규모)으로 조성하고 보고 즐길 거리를 만들기 위해 사업이익을 몽땅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끈질기게 가꿔 나갔다. 여기에는 국내에서 쉴 곳이 없어 가까운 일본, 동남아로 휴가를 떠나는 주한 외국 공관원들의 외화유출을 막고 건전한 국민관광지를 만들어 달라는 정부의 독려와 고장의 기대가 한몫 거들었다.




1988년 4월 - 본격적인 봄날씨 속에 휴일을 즐기려는 인파와 차량들로 초만원을 이룬 남이섬


IMF 외환위기로 한때 위기 직면


북한강 줄기와 경춘국도로 이어진 경기도 가평군과 춘천시는 행정구역상 다르게 구획되어 있다. 그러나 전통 사회 때부터 가장 이웃한 같은 생활권을 이뤄 왔다. 그 경계를 이루는 북한강에 떠있는 남이섬은 둘레가 6km, 넓이가 46만㎡(13만 7,000평) 규모인 내륙의 아주 작은 섬이다.


행정구역은 엄연히 춘천시이지만 접근 도로망과 유일한 통로인 도선 선착장이 모두 가평군에 쏠려 있다. 춘천 시가지와는 멀리 떨어졌다. 반면 가평시내는 지척에 있다. 그래서 남이섬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조차 춘천 남이섬이 아니라 경기도나 가평의 남이섬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강폭이 좁은 데는 200여m 밖에 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짧은 기간 동안 얼마든지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여건이다. 그런데도 눈을 씻고 봐도 다리를 놓을 계획이 추진된 적이 없다. 섬 전체가 사유지인데다 일반 거주민이 한 명도 살지 않는 국가하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 남이섬이나 체류하는 직원들조차도 지리적 특성상 다리로 손쉽게 건너가는 것보다 배를 타고 드나드는 것에 더 메리트를 부여했다. 행정구역 월경(越境)과 혼돈에 따른 여러 가지 불편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이어져 얼핏 영·호남 경계의 섬진강변에 있는 화개장터를 연상시킨다.


강원도 울진이 경북으로 개편되던 시절 내무부에서 C 군을 넘겨주는 대신 가평군을 강원도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있었다. 또 2차선 도로가 뚫린 남산면 방하리 쪽에 선착장을 옮기려는 구체적인 계획도 추진됐었다. 그때마다 수변구역 개발제한을 앞세운 환경부의 제재로 번번히 좌절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영도 순탄한 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춘선 주변에 있는 강촌, 대성리 등과 함께 젊은이들의 해방구(유원지)로 사랑받아 왔다. 그러다 관광업계의 지각변동과 함께 IMF 외환위기까지 겹쳐 한 때 속수무책의 난관에까지 직면했었다. 부산저축은행사건에 휘말려 멀쩡했던 유원지가 폐허로 전락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대목이다.





1973년 7월, 남이섬 유원지 선착장 모습으로 남이섬을 찾은 많은 행락객들이 유람선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드라마 ‘겨울연가’ 히트로 한류발원지 격상


1990년대까지는 강변가요 개최지나 최인호의 ‘겨울나그네’ 촬영지인 유원지로 연명했다. 2001년 12월 KBS드라마 ‘겨울연가’가 대히트를 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일본과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중국 등 아시아권 관광객의 발길이 급증했다.


연간 30만 명이 채 안 되던 방문객이 2004년에는 160만 명, 2012년에는 260만 명으로 폭증, 한류관광의 발원지로 급부 상했다. 어느새 관광춘천의 보물단지로 떠올랐다. 그 변화의 중심에 강우현 전 사장(현 탐나라 상상그룹 회장)이 라는 걸출한 경영인이 있었다. 지금은 그 바톤을 평생 동 안 남이섬 지킴이로 살아온 전명준 현 사장(공감경영 대상 CEO상 등 수상)이 이어가고 있다.





동화 속 풍경의 “나미나라공화국”


남이섬에 들른 날은 날씨가 무척 추운 12월 중순 주말 오후 2시께였다. 넓은 주차장에 의외로 버스와 승용차가 꽉 들어차 있었다. 매표소와 선착장에는 입장과 승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한참을 기다리다 배에 올랐다. 높이 80m 타워에서 1분 만에 남이섬에 닿는 짚와이어를 탄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육지에 빼곡한 주변의 이색 펜션과 음식점 상가 밀집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4~5분 남짓 배를 타고 선착장인 나미나루에 도착했다.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입간판과 ‘ 입춘대길문’이 방문을 반겼다. 입구의 남이 장군 묘역을 둘러보고 조금 걷다 보니 이번에는 남이섬의 트레이드마크인 ‘겨울연가’ 주인공들이 걸었던 메타세쿼이아 숲이 나왔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있다. 영원한 사랑과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웨딩촬영의 명소이다.


섬 중앙에 이르자 이번에는 길 옆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나왔다. 도서관과 갤러리, 매직박스, 기념품상 식당과 카페 등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 거리가 널려 있었다. 세계 30여 개국의 언어로 된 인사말 입간판 앞에서는 자국(自國)의 글씨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외국인들이 쭉 늘 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소주병을 재활용해 아름답게 꾸민 이슬정원 주변에는 섬의 주요 동선을 이어놓은 꼬마 열차(유니세프 나눔열차)가 기찻길을 내달렸다.


중앙광장에 있는 은행나무 길과 강변을 따라서는 자작 나무와 갈대숲길이 뻗어 있다. 예술가들이 호텔과 콘도 식으로 방을 꾸몄다는 정관루라는 부띠끄 호텔은 철 따라 각종 이벤트를 여는 곳이다. 노래마을과 행복마을에는 문화의 향기가 풍기는 갤러리, 박물관, 북카페가 들어서 갖가지 예술작품과 책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직접 작품 제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방도 여러 곳이었다. 그리고 쉼터에는 어느 곳이고 추위를 녹일 수 있는 화톳불이 온기를 전했다. 딱히 내세울 것은 아니어도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로 한나절 방문하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마치 영화 해리포터나 동화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2016년 2월 10일 설 연휴 마지막날, 남이섬을 찾은 시민들과 춘절을 맞아 한류관광을 온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만든 직원들의 노력


남이섬 정재우 팀장에게 “무슨 연유로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찾느냐”고 물었다.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독특한 콘셉트의 관광지를 꾸며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때묻지 않은 청정 환경을 유지하고 항상 내방객 입장에서 400여 직원들이 똘똘 뭉쳐 친절하고 정성껏 배려하는 것”이라고 비결을 꼽았다.


꽃과 나무를 심어 숲과 정원을 가꾸면서도 농약을 쓰지 않는다. 관광객들이 마시고 버린 소주병과 쓰레기조차 모두 자원으로 재활용한다. 여행업계에 관행처럼 되어 있는 리베이트(일명 수수료)도 없다. 직원들의 직급과 관념적인 인사제도를 없애 80세까지 일할 수 있도록 장수 시대에 평생직장을 실현해 노·사 간의 엇박자나 다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새싹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젊은이들에게는 모험과 낭만을, 장년층에게는 휴식과 추억을 안겨줘 남이섬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살갑다. 만국기를 게양하고 외국인 인사말을 그 나라 글씨로 써 놓고 책까지 비치해 외국인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심지어 할랄 공인식당과 무슬림 기도실까지 운영 중이다.


쇼핑이나 바가지요금으로 느끼게 되는 삐뚤어진 상술은 뿌리부터 근절돼 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이 관광객 입장에서 배려하는 걸 최우선으로 친다. 이런 소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중국의 사드 보복과 불경기 속에서도 남이섬 투어의 엄청난 관광객 흡입력이 생겨 지금도 진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인어공주상이 작별을 알려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올 때 바닥에 새겨진 ‘다시 만나요’라는 글씨가 긴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