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검색 닫기

VOL.387

2023-04
#교실에서 보낸 편지 #봄내를품다
-
사월, 춘천에서 피천득 선생님께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선생님의 수필 <인연>의 첫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시를 따라 쓰며 가슴이 뛰었던 열일곱, 저는 문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문학적인 삶을 살고 싶었는데요. 어느날은 ‘꿈’과 관련된 글을 쓰는데 도서관에서 스치듯 보았던 『인연』이란 수필집 중 ‘잠’에 대한 글이 있었던 걸 기억해냈어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인연』을 샀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 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지요. 

전혀 모르고 살던 대상이 어느 순간부터 계속 주변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상황 혹시 아시나요? 길거리에서, TV나 책에서 그 존재가 연속해서 눈에 띄는 신기함 말이에요. 저도 사실 선생님을 잘 몰랐는데요. 『인연』을 정독하고나니 마침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작품을 배우게 되었고, 또 마침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선생님이 나오시는 겁니다. 마침에 마침을 더한 걸 우리는 우연이라 하나요? 그것이 ‘마침’ 내 삶에 영향마저 미친다면 비로소 ‘인연’이라 부르겠죠. 

선생님의 글들은 문학 소년에게 이상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아한 문장의 향연에 초대된 저는 아사코를 떠올리며 달뜬 마음으로 잠 못 이루었지요. 나도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일종의 소망이 생긴건데요.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고 싶다는 고등학생의 치기였을까요. 선생님과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작가와의 만남도 많이 하고, SNS로 쉽게 소통할 수 있지만 당시 제게 작가란 다른 세상에 있는 아이돌 같은 존재였는데요. 고심 끝에 ‘샘터’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개인정보가 지금 같지 않은 시절이어서겠지요. 출판사에서는 선생님의 주소를 알려주었고, 전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저 순수한 감상과 동경의 마음을 담은 것 같습니다. 

며칠을 우편함만 봤던 것 같아요. 기다리던 답장이 왔을 때 조금 과장해서 문학 소년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답니다. 




‘내가 글을 쓰기 어려우니 전화로 이야기하기 원합니다 .’ 

삐뚤빼뚤한 엽서 글씨, 선생님의 당시 연세는 93세이셨지요. 종이에 적은 문장을 몇 번씩 연습한 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어요. 역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떨림만 오롯하게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몇 차례 통화 후에 선생님은 저를 집으로 초대하셨지요. 흠모하던 작가의 집에 초대받은 소년의 마음을 아시나요? 부끄럼 많던 저는 친구랑 같이 지하철을 타고 선생님의 낡은 아파트를 찾아갔어요. 잎이 싱싱한 화분을 사들고요. 책이 가득한 선생님의 방은 제 방보다도 작았습니다. 쇼팽을 듣고 계셨고, 사모님께 “더운 물 좀 가져와요.”라고 말씀하셨지요. 차를 마시며 두어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1910년생인 선생님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 수학한 이야기, 일제가 친일을 요구했을 때 금강산으로 숨은 이야기, 미국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를 만난 이야기 등은 정말 환상 같았어요. 요즘도 학생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며 “말하자면 윤동주 시인보다 한참 선배시지.”라고 하면 아이들 눈이 동그래집니다. 

이후 선생님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이 한권 나왔는데요. 그 책에는 선생님의 서재 사진도 있더군요. 사진에는 제가 선물한 화분이 놓여 있었는데요. 놀랍고 신기한 인연에 몸이 떨렸습니다. 책 속 활자로만 다가왔던 ‘문학’이 삶과 체온이 담긴 물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달까요. 

그리고 몇 년 후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뉴스로 들었습니다. 군복무 중이던 저는 모란공원으로 꽃을 들고 찾아뵈었지요. 수많은 묘소들 중 금세 선생님을 찾았고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습니다. 

선생님, 만년에 맞이한 소년을 기억하시는지요? 문학의 숲에서 서성거리던 소년은 이제 아이들과 숲을 탐방하는 국어교사가 되었답니다. 선생님께 배운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말이죠.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헤어진 후에도 다시 만나게 하는군요. 

사월에는 봄꽃이 만발한 학교에서 아이들과 <인연> 을 읽어보려 합니다.














김병현 

강원애니고등학교 교사. 문학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공명할 때 가장 신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