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시인 최관용>
옛날 옛날 덕두원엔
조선조, 덕두원은 교통의 요지였다. 덕두원(德斗院)의 원(院)은 공무 중인 역졸이나 공문서 전달자, 각종 호송원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조선왕조는 원을 운영하기 위해 원위전을 두었다.
그렇게 관리나 상인, 백성들은 석파령을 넘어오고 넘어갔다. 예전엔 지금의 강변도로가 나 있지 않았을 때였다. 다만 북한강을 거슬러 소금배가 올라오거나 뗏목꾼이 뗏목을 타고 한강으로 내려가곤 했다.
육로와 수로의 중심지가 덕두원이었다. 멀리 인제와 화천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춘천 덕두원 나루터에서 잠시 몸을 풀었다. 뗏꾼이든, 소금배이든, 상인이든 여행객이든 그 모두가 덕두원을 거쳤다.
원 주위론 주막거리가 번성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엔 왜놈들이 덕두원 골짜기 여러 곳을 파헤치고 굴을 뚫어 금을 캤다. 그래서 골짜기 냇가엔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살기 위해 아낙들은 들병이가 되어 술을 팔았다. 실레마을에 낙향해 있던 김유정은 덕두원을 자주 찾았다. 소설 ‘금 따는 콩밭’은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투영했다. 왜의 수탈이 뱀의 독아(毒牙)를 내밀던 그때, 농민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덕두원 나루터>
대바지 강엔 안개만이
서해방되고 22년 후, 전력생산을 위한 댐이 건설되었다.
의암 협곡을 가로막은 의암댐으로 하여 거대한 호수가 생겨났다. 신설도로가 강변 협곡을 따라 만들어진 것은 오래였다. 지금은 의암댐 다리 위로 자동차가 풍뎅이처럼 반짝이며 넘나든다. 가을이나 겨울이면 뭉글뭉글 안개가 피어올라 덕두원 마을은 꿈꾸는 마을로 변신한다.
춘천을, 사람들은 안개의 도시요 호수의 도시라 부른다. 시인은 시를 쓰고, 이야기꾼은 전설을 만들고, 화가는 몽환의 배경을 그린다. 옛날 대바지 강이라 부르던 강줄기는 수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에 갑자기 섬이 떠올랐다. 붕어섬은 부들 천지였다. 지금 그 붕어섬은 태양전지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대체 얼마의 전기가 저곳에서 생산되는지 아는 시민은 별로 없다. 다만 부들이 사라지고, 검은 유리판의 딱딱한 모습만이 짜증을 유발할 뿐이다.
이제 그 호수 위로 달걀만한 케이블카가 조롱조롱 매달려 삼악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교회가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줄금처럼 좁게 그어진 밭두 둑엔 조팝나무꽃이 눈부시게 일렁인다.
유리알처럼 맑고 환한 오후의 덕두원은 아늑하고 평안하기만 하다.
<덕두원 주막거리 터 기왓장(위)과 석파령 오르는 길>
염소시인이 누구에여?
최관용을 아십니까. 그러면 대개는 고개를 젓는다.
염소시인을 아십니까. 그러면 대개는 고개를 끄덕인다. 동네사람들은 그가 시인인 줄은 잘 모른다. 단지, 염소 기르는 집은 덕두원에서 단 한 집 뿐 이기에, 그렇게들 알아 고개를 끄덕여 준다.(이후 최관용을 관용이라 이름하는 걸 용서해 달라. 글맛을 살리기 위해서니까.)
최관용은 현재 덕두원리 3반장이요, 2,000여 평의 밭을 일구는 농사꾼이다. 게다가 이틀에 한 번씩은 아파트 보일러 기사로 일하러 나간다. 아주 바쁘고 바쁜 사람이다. 쓰리잡? 웬걸 그게 아니다. 이에 더해 80여 마리의 염소도 덤으로 키운다. 덤이라고? 아니다. 많을 때는 200여 마리를 넘기기도 한다.
이걸 혼자서 다하냐고? 그렇다. 혼자서 다한다. 귀신 같은 사람이라고 다들 혀를 내두른다.
그래서 독불장군이다.
고령의 어머니가 돕기는 하지만 식사 마련과 밭일을 조금 거들 뿐이다. 그의 아내는 서울에서 간호교사로 일하기 때문에 주말에나 가끔씩 들른다 .
아름다운 동화를 쓰듯이
최관용 시인.
그는 전직 기자였으나 적성에 안 맞는다고 때려치웠고, 인터넷사업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작고했다. 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평생 대를 이어오던 농사일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농사일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경운기도 못 몰아 밭고랑에다 경운기 처박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했다.
시행착오를 3~4년 겪었다. 하지만 밭농사는 소득이 나지 않았다. 일 년 수익으로 겨우 몇백만 원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취미 삼아 염소를 길러보면 어떻겠냐고.
그래, 취미 삼아.
수놈 한 마리, 암놈 두 마리.
소꿉장난하듯이, 아름다운 동화를 쓰듯이, 염소를 길렀다. 초보라 무진 애를 먹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웃었다. 밭농사나 잘 짓지, 쯔 쯔….
때로는 염소가 설사가 나 죽었고, 때로는 출산 중에 새끼가 탯줄에 걸려 죽었고, 때로는 잘 기른 염소가 똥값이 되었고, 이런저런 슬프고 억울하고 기막힌 일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뚝심 하나 남부럽지 않을 관용이. 그의 정성으로 취미 삼아 기른 염소는 50마리, 100마리, 200마리로 불었다.
이 엄청난 일들을 누구 손끝 하나 빌리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쓰리, 아니 포잡으로써 말이다.
최관용은 페이스북을 하면서 사진과 글을 올렸다. 사람들은 그를 염소시인 관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염소 기르기도 안정되어갔고, 밭농사도 소출이 잘 되어 괜찮았다. 가을이면 동네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옥시깃대 베놨어. 콩대가 산더미야, 빨리 가져가. 그러면 관용이는 즉시 달려가 그것들을 수거해 오곤 했다. 염소 사료론 최고였다. 그야말로 국산 오리지날이었다. 옥수수대와 콩대가 수북이 쌓여있던 밭 가장자리엔 염소똥이 한가득 부려졌다. 관용이가 고맙다고 인사한 거였다. 이웃의 농사는 염소똥으로 잘 되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지요~ 하며 관용이는 늘 씨익 웃곤 했다.
기가 막힌 경제적 순환이 아닐 수 없었다.
<덕두원천 하류>
30년 기다려 겨우 한 말, 아빠는 밥빠
그런데 이따금 관용이는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건 다 이 염소 때문이야.
그럴 때면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렸다.
엄마 엄마 머하세여어 네? 짜장면이 먹고 시퍼여~ 라고 소리 친다. 그러면 어머니는 초로(初老)의 관용이를 이끌고 짜장면집으로 간다.
짜장면 곱빼기가 즉시 관용이의 배를 채우건만, 왠지 그저 가슴이 허전하기만 하다.
2022년 어느 날이다.
가을 뙤약볕에 폭 익은 단풍잎이 진절머릴 칠 때였다. 수상한 사람들이 김유정 문학촌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내로라하는 시인, 작가들이었다. 농사꾼 시인 최관용의 첫 시집 출판회는 30년 늦은 만큼 감동이었다.
문단에 시인의 이름을 얻은 지 30년 세월이 되는 그런 시간 이었다. 남들은 이상한 문학잡지에 등단만 해도 곧바로 펑펑 강냉이 튀기듯 내지르던 시집을, 관용 이는 사계절이 서른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관용이는 자신도 새삼 경악했으나 겉으론 태연한 척했다. 무슨 다큐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가 아닌가. 시집은 우선 제목부터가 남달랐다.
‘아빠는 밥빠, 그래서 나빠’
시집은 처처이 풍자와 해학으로 넘쳐났다. 시집은 뱉음이었고 감춤이었고 까발림이었다. 시집은 현실을 인식한 메시지였고, 철학이 부재한 이 시대에 대한 비아냥이었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깊음이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은 꼭 읽어보시면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호기심 때문에 덕두원 염소시인을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두시면 좋겠다. 관용이는 늘 어디에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없을 때가 많다. 최관용은 이 세상 여느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용이를 일컬어, “물안개가 몰래 감춘 빛과 같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염소시인 최관용은 덕두원 파수꾼임이 틀림없다. *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