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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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6

2023-03
#예술가의 일상 수집 #봄내를품다
깊은 밤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모뉴먼트밸리는 마법을 거는 장소가 있어서, 

당신을 땅에 뿌리내린 듯 꼼짝 못하게 한다면,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LA TIMES 




아직은 한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나름 따뜻해진 공기에 밤산책을 나섰습니다. 발길 가는대로 걷다 보니 물이끼향이 나는 곳까지 다다랐더군요.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언제나 그랬듯 금빛 폭포가 조용히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밤의 소양강에는 근처 가로등이 수면에 비치며 금빛 윤슬을 만들어냅니다. 이를 소양2교에 서서 바라보면 마치 반짝이며 깊은 허공으로 쏟아지는 폭포 같기도, 저 먼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폭죽처럼 보이기도 하죠. 판타지 속 웅장한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 속 어딘가가 울렁이기까지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교문을 나선 늦은 밤. 그 날 따라 매일 버스를 타던 정류장을 지나 무작정 걷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완전히 바뀌어 버린 환경과 어수선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달래고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죠. 밤공기를 가르며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코끝에 약간 비릿한 물냄새가 스쳤습니다. 크게 거슬리는 냄새는 아니었지만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죠. 그리고 눈 앞에는 도로의 시끄러운 차 소리 사이로 고요히 반짝이며 쏟아지는 금빛 폭포가 있었습니다. 

 





드로잉 북 한 켠에 적어둔 짧은 문구처럼 마법에 걸린 듯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윤슬이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풍경에 매료되어버렸죠. 한참을 서서 저 멀리 빛을 내며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았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 오후나 해질녘의 윤슬도 좋지만, 특히 이곳의 밤 윤슬을 좋아합니다. 평범한 흐름의 일상 풍경에 소소한 특별함이 더해져 그날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중한 날을 다양한 감정과 생각에 잠겨 마무리 짓곤 하죠. 


저 멀리 아득히 사라져가는 폭죽을 보듯이 윤슬을 바라보다 보면, 종종 미술을 시작하기 전 모습이 겹쳐지곤 합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저 강물을 무한한 가능성과 꿈으로 채우던 때, 새하얀 백지를 다양한 상상으로 빼곡히 채우며 좋아하던 모습이요. 


지금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나 주위를 둘러싼 풍경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이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이를 체감할 때면 늘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오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면의 어린아이를 감추는 것에 익숙해지고, 점차 모든 것에 무뎌진다는 것.


까만 밤 풍경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윤슬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동안 감추어 잊고 살았거나 무뎌져 당연히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흘러가는 강물 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 어쩌면 우리들 내면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수영 

회화작가. 1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탓에 표준어와 사투리가 섞인 억양을 쓰지만, 어엿한 15년차 춘천인.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