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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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6

2023-03
#최돈선의 둘레마을 이야기 #봄내를품다
왜적들아, 3월이다! 의병마을 가정리


가정리 나루터




(위)류인석 묘에서 내다본 가정리 마을과 (아래)류인석 묘  



동학농민군의 옥쇄와 항일의 강

홍천강은 북한강의 지류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은 춘천에서 소양강과 만나고 그것이 춘천 남면 관천리에서 홍천강과 합류한다. 

이 큰 강은 가평을 지나 유유한 흐름을 지속하다가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서로의 물길을 섞는다. 

이것이 한강이다. 한강은 서울 한복판을 관류한 다음, 역시 금강산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손을 맞잡고 서해로 귀속하게 된다. 

홍천강은 원시림 울창한 태백준령 미약골에서 시작한다. 5월 이면 명개리 칡소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열목어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관천리 북한강 어귀까지 141km 길이를 홍천강은 흐른다. 그 물기슭엔 현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을들이 푸른 연기를 피워올린다. 

항거와 역동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서석마을!

동학군이 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자작고개는 흔히 말하는 자작나무 고개가 아니다. 

자작고개의 이름은 가슴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1894년 10월 22일. 당시 얼마나 많은 동학농민군이 전사했는지 그 고개를 넘어갈 때, 응고된 피가 신발에 쩍쩍 달라붙어 신발을 뗄 때마다 짜작 짜작~소 리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자작고개다. 동창마을과 서석의 자작고개는 가까운 이웃이다. 

당시 서석리에서 흘러내리던 강은 동학군의 시신이 흘린 피로 단풍처럼 붉었다고 한다. 

그 내촌천이 동창마을을 감돌아 가기를 25 년 뒤. 1919년 동창 장날에 3.1만세가 일어났다. 

내촌, 서석, 화 촌의 농민 천여 명이 과감히 떨쳐 일어난 만세운동이었다. 그 때 왜의 총칼에 8명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역사의 피를 머금은 강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쉼 없이 흐른 다. 

강이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마을을 지날 때, 모곡마을은 해 마다 고결한 무궁화꽃을 탐스러이 피워낸다. 이윽고 강물은 한적한 한 나루터를 무심히 적신다. 

가정리다. 외관으론 고요한 마을이다. 하지만 멀고 먼 애달픈 노랫소리가 아련히 귓전을 감돈다.  


애달도다 애달도다 

우리조선 애달도다 




(위)윤희순 옛 집터와 (아래)윤희순 유적지 



의병마을의 며느리 윤희순

4백여 년 전 형성된 고흥 류씨 집성촌 남면 가정리. 

1875년 16세 어린 나이의 한 처녀가 홍천강을 건너 가정리 나루에 도착한다. 

그니는 서울에서 300리 길을 노새와 배를 번 갈아 갈아타고 가정리 나루터에 도착했을 것이다. 

어린 처녀는 가정리와 인접한 남면 발산리 항골 외딴집으로 간다. 

그곳 산골 집에서 신랑 류제원과 신방을 차린다. 시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작고한 뒤였다. 

그니의 이름 윤희순. 집안이 풍족하지 못하여 그니는 숯을 구워 팔면서 시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윤희순의 아버지 윤익상과 시아버지 류홍석은 화서 이항로 선생의 학맥이다. 

위정척사 사상이 투철했고, 유학자로서 학문이 드높았다. 서로의 마음이 통할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자식들을 인연 맺게 했었을 것이다. 




윤희순과 가정리 여성들의 항쟁 

류씨 집안 며느리로 산 지 20년이 되어가는 1894년. 

동학농민 군이 서석리 전투에서 전멸하고, 그 피가 홍천강에 흘러 가정리로 올 때, 이듬해 10월 8일 명성황후가 왜의 낭인들 칼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3개월 후,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선포한다. 





이에 선비들과 온 나라 백성이 분연히 일어선다. 

“내 목을 칠지언정 내 머리를 자를 수는 없다.” 최익현의 결의는 유학자와 백성들의 분노가 당시에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윤희순의 시아버지 류홍석은 농민을 모아 의병 600여 명을 조직했다. 

그리고 방하리 고개를 넘어 가평 주길리에서 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마을 여성들은 의병을 위해 밥을 짓고, 윤희순은 사기를 북돋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부르게 했다. 여성들은 후방의 병참을 담당했다. 군자금도 모으고 전투에 필요한 긴요한 물자를 날랐다. 

여성들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윤희순의 지도력, 가정리 여성들의 독립정신과 평등한 애국심은 그 누구보다 강렬했다. 왜놈들은 날로 포악해져 갔다.

이런 왜적들을 피해 의병대장 류홍석은 일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류인석, 이소응과 함께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아들아 아들아, 네가 죽었구나

류인석과 류홍석의 관계는 6촌 형제이다. 

그러니까 류인석은 윤희순 부부의 재당숙인 셈이다. 대한13도의 군도총재 류인석은 대한의 최고 의병대장이었다. 

류인석은 문장과 학문이 깊어 많은 이들이 따랐다. 그의 항일은 조선의 구심점이었다. 이처럼 윤희순은 고흥 류씨 4대가 항일가족임을 긍지로 여겼다. 

그니는 1912년 중국 환인현에서 노학당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3년 뒤 일제는 그 민족학교를 폐쇄했다. 

그니가 가르친 학생으로 김경도가 있었다. 

김경도는 항일투쟁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고, 그의 아내 최씨는 그 소식을 듣고 누하 강변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 

시아버지 류홍석이 1913년 세상을 떠났다. 2년 후 대한의 의 병대장 류인석도 별세했다. 같은 해 윤희순의 남편 류제원도 운명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중에도 아들들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남편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1935년 윤희순의 큰아들 류돈상도 항일투쟁으로 체포되었다. 

류돈상은 무순감옥에서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 윤희순 의사는 아들의 사망 소식에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그리고 슬픔에 젖은지 11일 만에 윤희순 의사도 광복을 못 본 채 운명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76세였다. 




지금, 가정리의 하늘은

나는 몇 년 전 가정리를 출발하여 방하리 고개를 넘은 적이 있다. 석양빛이 가정리 나루를 금빛으로 물들일 때였다. 

대체 몇 고개인지, 구비구비 산길은 끝도 없었다. 왼쪽으로 홍천강이 흘렀다. 

밤이 되자 별이 초롱초롱 떴다. 밤길을 가면서 이 길이 류홍석과 윤희순 의사가 넘던 길임을 나는 까마득히 몰랐다. 

다만, 밤길을 걸었던 그때의 기억만이 아련히 떠오를 뿐이다. 


홍천강은 항일과 민족자존의 강이다. 강 유역마다 항일의 순결한 피가 꽃처럼 피어났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서석리 동학농민의 전투를 비롯하여 내촌 동창마을 3.1만세운동, 모곡리 남궁억의 무궁화마을, 그리고 가정리 의병마을이 그곳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 고결한 정신은 후손의 혼속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류인석 의병대장의 순국 100주년, 윤희순 의사의 순국 80주년에 ‘의병 주’가 만들어졌다. 의병주 만드는 방법은 정성이 깃들어야 한다. 

우선 찹쌀과 멥쌀을 갈아 엿기름을 섞어 가마솥에 끓인다. 이 과정을 열세 시간씩 세 번을 반복하여 달인다. 

달인 질금 물을 누룩과 섞은 후 25일 동안 항아리에 숙성시켜 완성한다. 이 술은 가정마을 집집마다 술을 거르던 가양주 방식인데, 마을이나 집안의 기제에 사용했었다. 

이 술은 류인석 의병대장의 제전에 바쳐졌고, 윤희순 가족 묘소에도 올려졌다. 그 향은 은은했고, 그 맛은 달았으며, 그 맑음은 순결했다. 


가정리 하늘은 시퍼러이 쨍하다. 

구름 한 점 없으매, 그 서슬 그 기상 푸르고 드높다. 나는 듣는다. 


귀한 목숨 아무 데나 버릴소냐 

나도 나가 의병하세 나도 나가 의병하세 


윤희순 의사의 그 목소리, 내 귓전에 쩌렁쩌렁 울리는 듯싶다.* 




 

(위)의병주 제조 장면, 가마솥과 의병주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