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과 붓을 오래 쥔 탓인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보니 첫번째 마디가 다른 손가락보다 볼록하게 부풀어 보입니다. 어제 썼던 물감의 색이 완전히 빠지지 못한 채 배어 있어 녹색빛을 띠기도 합니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열심히 그렸다는 의미의 훈장처럼 느껴져 뿌듯하네요. 이처럼 어떤 일을 오래 하거나, 우리가 거치는 모든 것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우리집 식탁에는 의자가 네 개 있습니다. 그 중 쿠션이 꺼져서 앉으면 딱딱한 나무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죠. 바로 제 고정석입니다. 아직 작업실도 없고 마침 학교도 휴학했던 시기, 코로나가 점점 확산되며 밖을 나갈 일 없이 집에서만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집에서 해결하는 일상이 시작된 것이죠. 그러려면 우선 널찍한 작업대가 필요했습니다. 방에 책상을 따로 두지 않았던 탓에 방문 밖, 식탁으로 영역을 넓혔죠.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상, 인터넷이나 분갈이 같은 취미 활동 등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앉아 보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까요? 퐁실하던 의자 쿠션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폭신하던 전과 달리 딱딱함만이 남았습니다. 어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의자에 앉을 때면 다들 화들짝 놀랐지만, 저는 쿠션감이라곤 전혀 없는 제 고정석 의자가 매우 편안했습니다. 찬찬히 쌓인 일상이 시간이 흘러서도 제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격하게 티 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큰맘 먹고 시작한 일들이 흐지부지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사람들이 이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인데요. 특히 일을 시작할 때 장대하고 찬란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 금세 흥미를 잃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러다 문득 책장에 쌓여 있는 드로잉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군생활을 하며 매일 밤 점호가 끝난 뒤 시간을 정해두고 그렸던 것들이었죠. 처음에는 손이 굳지 않을 정도로 매일 한 장, 두 장씩 그렸습니다. 그러다 전역할 때 쌓인 드로잉북만 한 가방 나오더군요. 그리고 이것들은 지금 작업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행동에 주어지는 처음의 몽글거림이 찾아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바삐 지냈던 작년의 잔해들을 정리하다 보니 그 분위기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보냈죠. 그렇게 남기고 간 흔적들을 완전히 마무리 지은 지금, 남들보단 조금 늦은 새해 다짐을 해봅니다. 사소한 일들이 하나씩 모여 제 주변에 흔적을 남겼듯, 대단한 일들이 아니어도 언젠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호흡을 천천히 가져가자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몽글거림이 지나간 자리에 올해에는 또 어떤 흔적이 남을지 약간의 설렘을 채워봅니다.
김수영
회화작가. 1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탓에 표준어와 사투리가 섞인 억양을 쓰지만, 어엿한 15년차 춘천인.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