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야.
네게 10년 만에 편지를 써.
좋은 기회를 얻어 봄내 소식지에 편지글을 싣게 되었고, 한참을 고민하다 가장 먼저 네가 생각났어.
교직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물 같은 선생님’이 되도록 살게 해준 사람이 너거든.
책장 속 보물상자를 오랜만에 열어봤어.
지구 멸망이 3일 남았다면 서둘러 열어보고 천천히 웃음지으며 읽을 학생들에게서 온 편지들.
우리반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가 다시 접어 놓은 내가 쓴 편지들.
거기엔 그 시절 우리의 힘겹고 불안했던, 따뜻하고 다정했던 날들이 다 모여있지.
미처 답장 못한 숱한 편지들에 소중한 지면을 빌려 마음을 전하려고 해.
이 편지를 정말 많은 분들이 읽으시겠지.
오늘의 수신인은 연우 너지만 이 도시에서 다정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연재될 편지를 읽으며 씨익 웃으셨으면 좋겠어.
얼마 전 선생님들 독서 모임에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매리 앤 새퍼)이라는 서간체 소설을 읽었는데 서로의 편지로만 이루어진 그 책이 어찌나 다정하고 재밌던지. 그런 마음을 독자분들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야. 봄의 이름을 지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봄의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
‘선생님’이라는 낯선 호칭을 얻고 처음 만난 너희를 기억해. 당시 ‘차도남’이란 말이 유행이었는데 난 읍내에 방을 얻어 ‘따읍남’(따뜻한 읍내 남자)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기가 느껴져.
너희에게 매달 편지를 써주었던 것 기억하니?
참 많은 약속을 했더구나.
처음 마음처럼 늘 믿겠다고, 아낌없이 사랑하겠다고.
우리반에 서른 명이 있으면 1대 30으로 보는게 아니라 1대 1을 서른 번 하겠다고. 그 중에서도 우리반 단합대회를 갔던 날, 총총 별이 빛나던 여름밤 아래 연우 네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가장 진솔하게 적어놓았어.
강물같은 선생님이 되겠노라고.
“선생님은 강물 같아요.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아무리 모난 아이들도 다 어루만져 주시잖아요.”
그때 사실 나는 실개천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교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소양강을 보며 너의 말을 떠올리곤 해.
넉넉한 품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내 마음은 가물 때가 많지.
그래도 강물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너와의 약속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어. 여전히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공을 차고, 햇살 가득한 날에는 아이들과 기타 치며 노래도 하고, 그때처럼 수업시간에 시를 읽으며 가슴 벅차기도 해. 그동안 나는 고3 담임을 꽤 여러 번 했는데 불안한 미래에 같이 힘들어했고, 원하는 목표를 이루면 뜨겁게 손을 잡기도 했어.
너희 졸업식에 그랬던 것처럼 매년 노래를 만들어 선물해 주기도 하고 말이야. 어느새 시절이라 불러도 좋을 날들이 지났네. 연우 너는 언젠가 편지에서 얘기한 대로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더구나.
안개에 갇힌 듯한 고민과 방황의 시절 함께 속삭이던 꿈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선생님이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삶에는 유독 진한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교사의 가장 큰 보람은 아이들의 농밀한 시기를 함께한다는 것 같아. 그 시간들이 쌓여 너도 꿈을 이룬 거라 믿어.
그 옛날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에 ‘글은 기억보다 힘이 세다’는 구절이 있더라. 이 편지도 너에게, 나에게도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길, 봄내 독자들께도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도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나는 수많은 인연들에게, 그리고 이를 지켜보실 보호자분들에게 진심을 나눈 관계는 꽤 오래도록 단단하게 서로의 마 음을 채워준다고 말씀드리고 싶어.
오늘도 투명한 아이들과 알콩달콩 하루를 보냈을 연우 선생님!
다정과 사랑이 가득한 ‘강물 같은 선생님’이 되어 우리 바다에서 만나자.
그 바다에는 그날 밤하늘처럼 별이 가득할 거야.
김병현
강원애니고등학교 교사. 문학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공명할 때 가장 신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