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강촌역과 강촌거리
북한강
북한강의 원류는 금강산이다. 금강산에 인접한 화천강과 인제 소양강이 춘천 봉의산 허리에서 합수하여 북한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북한강은 양수리 쪽으로 흐름을 잇다가 남한강과 만나 거대한 한강이 된다. 한강은 600여 년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관류하여 서해 강화도로 빠져든다.
조선조부터 북한강은 원목을 벤 뗏목이 한양으로 운반되는 주요 교통로였다.
그리고 인천이나 서울에서 소금을 실은 소금배가 거슬러 올라 춘천의 덕두원에 닿았다.
당시 험난한 물길에 몸을 맡기고서 떼꾼들은 아리랑 뗏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랬다. 실로, 부평초 같은 삶이었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우수나 경칩에 물 풀리니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간다
합강정 뗏목이 많다고 하되 경오년 포락에 다 풀렸네
앞 사공 뒷 사공 물조심하세 포아리 물싸품이 치솟는다
도지거리 갈보야 술 거르게 보맥이 여울에 떼 내려온다
포아리 신영강을 다 지나니 덕두원 썩재이가 날 반긴다
조선조의 김시습이나 정약용.
그들이 배를 타고 춘천을 오르내리던 강도 북한강이었다.
그만큼 북한강은 수운(水運)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남북한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비극의 강이기도 했다.
1960년대 강촌역
그 북한강을 끼고 경춘선이 개통된 해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제강점기엔 대개의 철도가 조선총독부의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경춘선은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유일한 철도였다.
이 ‘겨레의 철도’는 당시 춘천의 경제인들과 춘천시민이 한마음으로 성금을 모아 철로를 깐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자부심에 차서 말했다.
강원도의 힘은 춘천의 힘에서 나온 거라고.
정태춘이란 이름의 음유시인
경춘선은 머리 박박 깎은 청년이 입영하던 길이었다. 102보충대가 춘천시 용산리에 있었다. 연평균 4~5만 명, 1953년부터 2016년까지 약 260여만 명이 이 102보충대를 거쳐 갔다. 장정들은 90년대까지는 주로 열차나 버스를 이용했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온 장정들의 수는 타지역을 빼고 어림셈으로 200여 만 명이 훨씬 넘었을 거라 했다.
1974년 몸이 호리호리하고 말수 적은 한 청년이 춘천행 새벽 열차를 탔다. 그 청년은 102보충대로 가는 길에 처음 북한강의 안개를 보았다.
그 청년은 음유시인 정태춘이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1984년 ‘북한강에서’라는 노래가 발표되었다. 정태춘이 직접 작시 작곡하여 부른 이 노래를 입영열차를 탄 청년들은 열차 안에서 부르고 또 불렀다.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고…
당시의 입영 청년들은 ‘북한강에서’를 불멸의 노래로서 영원히 기억했다.
강촌에 살고 싶네
1965년 저녁 무렵, 한 중년 신사가 강촌역에 내렸다. 그는 오래도록 강촌역에 면한 북한강과 강가의 버드나무 숲을 바라 보았다.
등선봉 산마루로 석양이 이울고 있었다. 그는 역 근처 춘강옥이란 상호의 여인숙에 투숙했다. 밤새 그는 글을 쓰고 다듬었다.
정재억 님과 노래비
작사가 김설강(안경 쓰신 분), 작곡가 김학송(흰 양복 착용)
그리고 아침이 되자 강가로 내려가 버드나무 숲과 강가를 거닐었다. 그 신사는 유명한 작사가 김설강이었다.
그렇게 작사된 김설강의 ‘강촌에 살고 싶네’는 1969년 김학송의 작곡으로 세상에 나왔다. 가수는 22세의 나훈아였다. 청바지 차림의 나훈아는 이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70년대를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가 경춘선을 독차지했다. 그 노래는 은둔의 강촌을 MT의 성지로 바꾸어 놓았다.
복합전철로 경춘선이 바뀌기 전까지 강촌은 MT뿐만 아니라,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했다. 토요일 일요일은 대도시의 거리 못지않게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강과 계곡 곳곳이 절경이었고, 주변엔 가볼 곳이 너무 많았다. 그중 구곡폭포는 사시사철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날 정도였다.
강 건너 등선폭포 역시 역사적인 절과 기암괴석, 울창한 수림, 멋진 폭포수의 풍광,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악산 산정은 산행하는 사람들에겐 천혜의 등산코스였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열차가 강촌에 진입하던 그 순간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거대한 협곡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질 때, 그 신비감을 어찌 잊을수 있겠냐고.
노랫말을 지은 김설강 님이 강촌을 한눈에 알아본 것은 놀라운 심미안이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라는 절구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올 정도로 강촌은 매력이 넘쳤다.
김학송 작곡가 편지, 노래비 건립 승낙서
그러나 2000년부터, 유행하던 MT 붐도 시들해져 가기 시작했다.
MT 문화는 무질서한 구타와 술마시기로 변질했다.
MT. 그것엔 ‘마시고 토하기’라는 자괴감이 내포된 기피단어가 되었다. 술에 못 이겨 사망한 여대생도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다. 그리하여 MT는 낙후된 청년문화의 상징처럼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았다.
강촌의 경제는 급격히 하락했다. 이에 강촌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강촌문화마당’이 그것이었다.
강촌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이 필요했다. 정재억 회장을 중심으로 회원들이 숙의한 결과,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작사가 김설강 님을 찾아갔다. 노래비 승낙서와 가사를 쓰게 된 동기, 노랫말에 담긴 목가적 꿈을 작사가는 조근조근 설명했다. 그리고 김설강 님은 3개월 뒤에 폐암으로 운명했다.
2005년 노래비 제막식이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하지만 작사가인 김설강 님도, 작곡가인 김학송 님도, 노래를 부른 나훈아 님도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노래비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나훈아의 ‘날이 새면 물새들이~’가 물결처럼 흘러나왔을 때, 정재억 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했다.
현자의 소망
나는 정재억 님에게 강촌의 현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칠순의 나이에도 그는 강촌의 궂은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강촌은 그의 뿌리이고 그가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니까.
김설강 님의 노랫말은 자신의 동심을 소환하는 촉매제였다. 그래서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는 늘 정재억 님의 마음속을 청청하게 메아리쳤다.
조용한 현자는 멀리 볼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곁도 찬찬히 들여다본다.
강촌은 아직도 무언가를 꿈꾼다. 그건! 강촌 사람들 가슴속에 남은 희망의 불씨 같은, 그런 것이 아닐까. *
최돈선
시인. 춘천시 둘레엔 1개 읍, 9개 면이 있다. 나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 고요한 곳에 현자는 있을 것이다. 당산목 같은 우직한 당신의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