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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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5

2023-02
#봄내를 즐기다
봄내 산책로 이음길 5
봉황이 돌아오길 꿈꾸는 ‘문소(聞韶)길’


'칠층석탑'과 '기와집골'

소양강가 당간지주와 이웃하고 있는 칠층석탑(보물 제77호)은 전형적인 고려중엽의 석탑으로 2층의 안정감 있는 기단 위에 7층의 탑신(5.5m)이 놓여져 있다. 이 탑 부근에는 여러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인조 때 발굴되었다는 충원사 터는, 근래 천원사 불기도 나와 다른 절이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이 일대가 미나리 밭이었으며 탑 주변까지 물이 들어 왔다고 한다. 바로 맞은편에 서부시장이 있고 주변에 주택이 들어 차 있던 곳으로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탑 주위는 역사공원(사색의 길 출발지)으로 조성되었다. 춘천에는 8기의 석탑이 남아 있다. 

이곳 탑거리에서 이어지던 기와집골은 봉의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양강을 끼고 있는 명당 터로 불렸던 곳. 일명 ‘백석동’으로도 불렸다. 백석지기들이 살았던 부촌으로 기와집골로 불렸으나 2021년 3월 고층 아파트 건설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준상이네 집이 있던 곳이다.



소양로 칠층석탑




국내 최초의 반원형의 평면 건축... '소양로 성당'

소양로 성당은 국내 최초로 근대적 양식을 도입한 성당건축물이다. 1950년 1월 15일 죽림동성당에서 분가되어 설립되었으며 한국전쟁에서 순교한 고 안토니오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이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성체를 옮겨놓고 신자들에게도 피신하라고 권하며 사태를 지켜보았다. 6월 27일 죽림동성당으로 이동하던 중에 공산군에 잡혀 총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함께있던 복사 김경호 가브리엘을 몸으로 덮쳐 살려냈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뾰족 종탑이 없다”며 의아해 하고 반원모양의 평면을 보고 ’왜 성당을 반쪽만 짓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고한다. 2005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말 춘천관아에 만들어졌던 이궁(離宮)

춘천도호부는 조선이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은 후 집권자들에게 국방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다. 구한말 개항 후 변란에 시달린 고종 임금(1852~1919)은 유사시에 대비할 피난처를 물색하다가 1888년 춘천이궁 건립을 명했고, 1890년 제2대 춘천유수 민두호 재임 시에 완공되었다. 이는 신축이 아니고 관아 안의 문소각을 증축하고 수리했다. 그러나 고종은 춘천에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조선 인조 24년(1646)에 춘천 부사 엄황이 조성했던 관아를 기반으로 조성된 이궁은 문소각(聞韶閣:임금의 침실), 조양루, 위봉문, 조양문⋅묘천문⋅귀창문 등 총 27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관아였고, 이궁 주위는 성처럼 담장을 쌓아 왕궁의 품격을 갖추었으며, 300개의 장독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춘천이궁 디지털 복원 모습 - 출처 G1 강원민방 다큐 <춘천이궁 - 고종황제의 사라진 궁궐>





봉황이 날아와 춤추길 기다리는 '문소(聞韶)'

문소(聞韶)는 태평성대를 이뤘던 중국 순 임금이 만든 음악으로 공자는 ‘소(韶) 음악을 듣고 석 달씩이나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심취했다고 한다. 소(韶)는 9악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소 음악이 아홉 차례 연주되자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봉의산(鳳儀山)의 봉의(鳳儀)는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춘다’는 뜻으로 <서경> 익직 ‘소소구성 봉황래의 簫韶九成 鳳凰래儀’가 그 어원이다. 봉황은 ‘태평성대’를 뜻한다.

이궁 유적 중 살아남은 조양루(강원도유형문화재 제2호)와 위봉문(강원도유형문화재 제1호)은 우여곡절 끝에 2013년 도청 옆의 옛터 인근으로 함께 옮겨졌다. 춘천관아에 이궁(離宮)을 만들면서부터 ‘춘천’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었고 1896년 강원관찰부 소재지가 되었다. 현 강원도청 건물은 1940년 화재와 6.25 전화로 1957년 새로 지어졌으나 노후 되어 2028년 신청사가 동내면 고은리에 지어진다. 옛 춘천관아의 이궁이 어느 만치 제 모습을 드러낼지 기다려진다.



조양루



봉의산 순의비




호텔 정문으로 남은 '강원신사' 솟을삼문

새로 자리잡은 조양루와 위봉문을 지나 도의회 건물을 비껴가면 숨은 듯 나타나는 오르막 계단이 있다. 세종호텔 정문으로 가는 샛길이다. 이 높은 터에 자리한 호텔 정문은 특이하다. 일제 신사의 전형적인 솟을삼문이 오롯이 남아 있다. 

1918년 3월에 춘천신사가 창립되었고 1938년 6월에 강원신사로 바뀌었으며 미 군정기에는 춘천 부립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가 6.25 전쟁 중에는 인민군이나 국군이 이곳에다 천막 야전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국폐신사 중 하나였던 강원신사(神社)의 건물 기반이 현 세종호텔 부지 내에 그대로 남아있다. 정문 옆에는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는 장소인 수수사가 있으며, 호텔 본관 뒤편에는 옛 신사의 본전과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나, 지금은 출입문과 수수사 흔적만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신사로 이어지는 아주 긴 계단이 있었으며, 학창시절 이곳에서 춘천시내를 보며 미술대회를 하거나, 사진을 찍었다고 기억하는 시민들도 있다.






'봉의산'과 '봉의산성'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301m)은 봉산(鳳山), 봉악산(鳳岳山), 봉의산(鳳儀山)으로 불렸다. 누군가는 봉의산은 멀리서 보면 봉긋한 젖가슴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봉의산 자락에는 춘천관아(현 강원도청)가 있고 지금은 한림대와 아파트 단지들이 둘러 있으며, 뒤쪽 소양강가에는 삼한시대부터 있었다는 유서 깊은 정자 소양정이 있다. 봉의산은 사방에서 오를 수 있는 산책로가 있어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에 봉의산성이 있다. 산의 능선에 지형을 살려 쌓은 산성이다. 성의 원형은 많이 훼손되어 석축의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과 1993년 일부를 복원하였다. 

1253년 9월 20일 춘주 봉산성은 대몽결사항전의 장이었다. 봉산성 전투에 참전한 춘천사람들이 전멸한 항몽전장이다. 제4차 야굴군에 의한 침입으로 안찰사 박천기가 결사대를 조직해 맞섰으나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때의 참상은 고려사절요로 남았다. 

이곳에서 몽골군과 대치하다 전사한 안찰사와 춘천부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83년 봉의산 순의비가 세워졌다. 

당시 개경에 있던 문신 박항(1227~1281, 춘천박씨 시조)이 내려와 보니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아 부모로 의심되는 자만 300여 명을 장사 지냈다고 한다.



봉의산성



봉의산 뒤쪽




'한림대학교'와 '혈거유지'

강원도청에서 세종호텔을 거쳐 이어지는 봉의산성 쪽 산책로를 돌아 정상에 서면 춘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안마산, 국사봉, 의암봉에서 보던 풍광과는 색다른 모습이다. 봉의산에서 한림대 산책로를 따라 내려서면 캠퍼스 후문이다. 1960년대에 건립돼 수녀님들이 운영하던 성심여자대학교가 있던 곳이다. 

1982년 학교법인 일송학원이 한림대학교 설립인가를 받으면서 병원과 의학대학 중심으로 성장, 전국적인 종합대학으로 우뚝 섰다. 캠퍼스 부지가 넓지는 않으나 봉의산을 배경으로 앞이 트여 전망이 좋다.


봉의산 자락인 한림대 내에 위치한 혈거유지(穴居遺趾)는 영서지방 유일의 신석기 문화유적으로 꼽힌다. 인공동굴 유적으로 1972년 강원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1962년 성심여자대학(현 한림대학교)의 신축부지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3명의 인골(人骨)을 비롯하여 돌도끼, 돌화살촉,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동굴은 봉의산 중턱(해발150m) 동쪽 기슭에 경사면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파 들어가 만들었으며, 크기는 지름 4m, 최고 높이 2.1m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살았으나 폐기한 뒤 무덤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한림대학교에서 춘천향교로 내려오는 코스와 대학교 동문으로 내려가 다시 애막골 산책로로 연결하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한림대학교에서 춘천시의회 쪽으로 오면 유봉여고 아래로 이어지는 골목길 끝머리에향교가 있다.



한림대 내 혈거유지




조선시대 국립 중등교육기관 '향교(鄕校)'

기와집골이 봉의산의 좌청룡이라면 향교 일대인 교동은 우백호에 해당한다. 따스하고 아늑해 춘천에서 제일 처음 감나무가 자란 곳이며, 관아의 관리들이 많이 살아 아동(衙洞)리로 불리기도 했다. 춘천향교는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원천석 등의 시문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무게를 둔다. 아무튼 6백년 이상을 자리한 터줏대감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의 정문 역할을 하는 장수루(藏修樓)가 있고, 뒤편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다. 명륜당 뒤쪽 내삼문을 지나면 대성전이다.

춘천향교의 지계사호성비는 유생 지계사가 병자호란 때 대성전의 위패를 대룡산 동굴로 이전했다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비갈이다. 춘천향교는 2017년 귀중한 사료인 청금록과 수춘향약 등이 발견돼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향교가 있는 곳의 지명은 ‘교동(敎洞)’ 또는 ‘향교골’이라 불린다.



춘천향교







신용자 2009년부터 ‘우리 땅 걷기’ 및 지역의 옛길 탐사에 빠져 ‘길미녀’가 되었다. 우리네 역사와 문화, 생활의 숨결이 밴 옛길을 걷기 코스로 만들며 ‘춘천문학여행’, ‘봄내유람’을 거쳐 현재 우리 땅 답사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춘추마실과 이야기’, ‘적멸보궁 순례길을 걷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