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로렌초라고 불리는 현대건축의 대가 故김수근. ‘빛과 벽돌로 지은 시’로 표현되는 그의 건축물들이 여전히 춘천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준공 이후 40년 넘도록 원형 그대로 보존된 3개의 건물들이 담고 있는 건축사적 의미를 알아보고 공간에 스며든 스토리와 궤적을 따라가 보자.
한 손에 딱 쥐어지는 벽돌. 벽돌은 따뜻한 느낌을 주면서 손으로 한 장 한 장 쌓는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건축 자재다. 김수근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아닌 인간이 가장 친숙하고 아늑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붉은 벽돌을 주로 사용했다. 김수근이 원숙기인 50세(1980)전후로 춘천에 남긴 건물 3동 모두 벽돌을 소재로 지었다. 신용보증기금 건물은 견고한 신용사회 구현의 선봉에 선다는 기관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열을 과하게 하여 태운 과소(過燒)벽돌을 사용했다. 춘천어린이회관은 뒤뜰에 아름다운 의암호가 흐르고 분지가 내려 앉은 곳에 창조된 벽돌 건축물이다. 향토문화관은 벽돌을 쌓아 우아한 곡선을 선보여 육중한 건물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마흔 살 ‘신용보증기금’ 사옥의 재탄생
지난해 12월, 1년여의 리모델링을 마친 신용보증기금 춘천지점이 새로운 출발에 나섰다. 당초 신용보증기금은 건물 구조 및 마감재 노후로 인해 안전검사 문제가 대두되자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재건축을 추진했다. 1981년 12월 준공된 만큼 노후화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 문화예술과에서 벽돌을 마감재로 사용한 김수근의 후기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례로 춘천지점을 적극 보존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리모델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춘천신용보증기금 김은희 지점장은 “벽돌건물이라 누수가 심하고 허술한 냉·난방, 안전 문제까지 불거져 매각수순을 밟고 있었던 건 사실”이라며 “시와 논의 후 건물 외관의 재료와 형태를 최대한 보존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고 말했다. 신용보증기금은 단순히 외장재를 보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초 건축적 의도를 강화하는 형태로 공간을 변화시켰다.
이번 리모델링을 맡은 안광일 건축가는 “기존 건물을 재해석하고 현재의 시간을 덧씌우는 작업을 진행했다”며“무엇보다 내진 보강 등 안전성을 우선으로 하되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조형적으로 보면 두 개의 큰 기둥이 양쪽에서 중앙의 커다란 덩어리를 지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구조시스템 또한 그렇게 계산되어 있어서 대부분 실들이 위치하고 있는 덩어리 내부에는 기둥이 없다. 리모델링은 이러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1층을 비워 큰 매스가 양옆 기둥에 매달려 떠 있는 모양처럼 만들었다. 전면에는 시민들이 걷다가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눈에 띄는 건 다이크로익 필름*을 붙인 색색의 유리 스크린이다. 기존 건물의 유리커튼월이 있던 위치에 같은 방식으로 설치하여 김수근 건축가의 오마주로 남겼다.
신용보증기금 춘천지점
* 다이크로익 필름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색감이 다르게 보이는 필름.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춘천어린이회관
의암호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하늘에 서 보면 마치 붉은 나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축가 김수근이 아이들을 위해 만들었던 ‘놀이집’ 춘천어린이회관이다. 김수근은 처음 설계 의뢰를 받고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집안에 아늑하게 숨어있다 나오면 햇빛이 옆으로 비쳐 들어오다가 지붕에서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고 어느 부분에 오면 탁 트여 구름다리 같은데서 호수와 산이 보이는 공간상의 해프닝을 테마로 삼았어요”(1980.7.11. 경향신문 인터뷰)
춘천어린이회관은 ‘둘러싸여 있으나 막히지 않은 공간’을 추구한 김수근의 건축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건물 안에 똑같은 크기의 공간이나 벽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독특하다.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자라나길 바라는 김수근의 배려였다.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던 어린이회관, 밤이면 작은 공연 무대가 펼쳐지던 야외무대, 어머니와 함께 회관 내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오므라이스 맛이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어린이회관은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2014년 4월 상상마당 춘천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KT&G 상상마당 춘천
중세시대 성채를 만나다, 강원도향토공예관
김수근이 설계하여 춘천에 남긴 마지막 작품은 서울에서 춘천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서 있는 강원도향토공예관이다. 이 붉은 벽돌 건물은 육중하고 폐쇄적인 입면에 리듬을 주는 요소로 수평성을 강조하는 짙은 회색 벽돌이 더해져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 건물의 진가를 모른다. 벽돌로 일일이 쌓은 계단 위에 올라 건물과 마주 서 보기를 추천한다. 눈 앞에 중세시대 성채가 펼쳐지는 마법의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는 수원화성을 지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게 쌓아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전쟁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있지만 아름답게 쌓음으로써 그 성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고, 이것이 아름다움의 힘이다”
아름답게 쌓았고, 소중하게 지켜낸 춘천의 붉은 건축물. 이 아름다운 곳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지 이제는 시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강원도향토공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