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음악감독. 1982년생 춘천 출신.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영화과 사운드 전공으로 영화에 한층 더 다가갔다. 영화음악가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지 10년 차.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 연출자와 영화 음악가들을 위한 강의도 8년째 이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듣고 흥미로운 요소에 이끌려 영화를 본다. 아름다운 영상미, 화려한 액션, 탄탄한 줄거리,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 감독의 독특한 연출 방식 등 기호에 맞는 영화를 선택하고 나면 기억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포스터나 티켓을 모으는 사람이 있고, 감상 후기를 SNS나 일기장에 적어두어 오래도록 곱씹는 사람이 있다. 필자의 경우 집에 오는 길에 영화에 삽입된 곡을 꼭 찾아 들어본다. OST 앨범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지 않으면 대표곡 하나라도 들으며 영화 장면들을 상기한다.
권현정 음악감독과 인터뷰 일정을 잡고, 그를 만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떠올리듯, 일주일간 그의 음악을 들으며 상상했다. 섬세하고 다정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작업 방식은 어떤 모습일까.
권현정 감독은 음악에 앞서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제작 과정을 들려주었다. 영화 제작은 보통 3단계로 나뉜다. 1단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우와 스텝들을 섭외하는 등 영화 촬영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하는 시기다. 2단계 '프로덕션(production)'은 본격적으로 크랭크인** 하고 크랭크업** 하는 시간이다. 3단계 '포스트 프로덕션(post production)'은 촬영이 끝난 후 영상 편집, 음악과 음향 추가, 특수효과, 색보정 등으로 영화를 완성하는 단계다. 음악감독은 3단계에 합류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1단계부터 시나리오를 토대로 컨셉을 정해 회의하고 2단계 영화를 찍는 동안 수많은 가이드곡을 만들어 놓는다. 편집본이 나오면 곡들을 넣어보고 어울리는 느낌을 계속 맞춰본다. 음악감독이 언제 투입되는지에 따라 작업량이 달라질 수 있는데, 권현정 감독은 보통 1단계에 합류하는 것을 선호한다.
1단계 때 시나리오를 받으면 분위기가 비슷한 영화와 음악을 찾아보고 음악 컨셉을 정해요. 분위기나 악기, 장르도 고민하죠. 장르가 정해지면 2단계에서 1분 내외의 곡을 50개 이상 만들어놔요. 3단계 영상 편집본이 나오면 잘 어울리는 몇 곡만 선택되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립니다. 많은 곡을 써놔도 마감을 맞추기 위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곡 작업을 많이 해놔야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사운드적’으로도 접근해요. 장면 안에서 날 수 있는 소리로 리듬을 만드는 거죠. 일상의 소리를 음악으로 해석하는 걸 재밌어해요. 악기 말고도 이런 요소들로 음악을 만든답니다. 작곡가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본연의 소리, 재료에 대한 남다른 시선으로 작업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그런 구간이 영화마다 있는 편이예요. 하하
* 크랭크인 Crank In. 영화 촬영을 처음 시작하는 것. 크랭크란 말은 영화촬영기의 손잡이에서 유래된 용어로 촬영이라는 뜻.
** 크랭크업 Crank Up. 영화 촬영을 종료하는 것.
영화음악은 영상이 있어야 존재한다. 오직 영화만을 위해 곡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음악이 너무 돋보이지 않으면서 영화에 잘 묻어나도록 애쓴다. 배우가 연기를 통해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것처럼, 권현정 감독은 음표로 연기를 하고 있다. 장면 장면의 미세한 움직임과 캐릭터의 스쳐 가는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 구간을 100번 넘게 돌려 보고 곡을 넣어본다.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를 맡으면 함께 우울해지고 <소공녀> 영화를 작업할 땐 주인공 미소가 된 것 같았다고. 캐릭터의 심정을 살피고 들여다보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의 곁에서 오래 대화하고 싶었다.
일단 엔딩크레딧** 이 영화의 마지막 인사에요.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가는 걸 봐주셨으면 해요. 엔딩크레딧 음악은 영화가 기억되는 마지막 인상이거든요. 두 번째로는 영화 음악마다 테마가 있어요. 그 테마를 찾으면서 보면 반복되는 테마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부분에는 음악으로 복선을 깔아놓기도 하는데 그런 숨은 재미가 있죠.
네, 감격스럽죠. 저만의 작업 노트가 있어요. 감독님들과 곡에 대해 나눈 의견을 적어놔요. 특히 힘이 되는 말은 꼭 적어놓고, 주고받았던 농담까지도 적어놔요. 기억에 남는 건 감독님이 빼려고 했던 장면을 음악을 들어보고 넣은 경우에요. <소공녀>에서 미소가 한솔을 배웅해 주는 장면이 있어요. 계단에서 뽀뽀하는 장면인데, 감독님은 그 부분을 드러내려고 했어요. 저는 '여기는 음악이 들어가야 하는 구간이니 내가 일단 써보겠다, 들어보고 결정해달라'고 했죠. 곡을 보냈더니 감독님이 ‘당연히 음악이 있어야 할 구간인 것 같다. 음악이 들어가면서 너무 좋아졌다’ 고 말씀하셨는데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 엔딩크레딧 Ending credit 영화가 끝난 직후 스크린 자막을 통해 제공되는, 영화 제작과 관련된 상세 정보
지금은 양평에 살고 있지만 친정이 있는 춘천에 종종 들른다.
"춘천은 늘 따뜻하고 그리운 곳이에요. 할아버지께서 소일거리로 작은 농장을 하셨는데 옆에 고즈넉한 작은 계곡이 있었어요. 여름만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백숙을 먹고 하루 종일 수영하고 놀았는데 지금도 가끔 사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해요. 그 장소가 지금은 도시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선 거두리예요."
부안초등학교에서의 국악부 활동으로 민요를 부르고 가족의 영향으로 다양한 음악을 접하면서 중학생 때 영화에 들어가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하지만 안정적인 미래도 중요했기에 대학 졸업 후 춘천시립합창단에서 악보계** 로 7년을 근무하기도 했다. 20대 후반 진짜 하고 싶었던 걸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모님 몰래 대학원을 준비했고, 결국 합격하면서 온전한 영화음악감독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지금이 꿈 같을 때가 있어요. ‘내가 진짜 영화 음악을 하고 있구나. 참 행복한 삶이다’하고 생각해요. 늦게 돌아오긴 했지만 꿈이 있다면 늦을 때란 없다고 생각해요. 이 표현이 진부하지만 맞는 말이고 핵심이에요. 제가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 음악가를 꿈꾼다면 영화를 많이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OST를 많이 듣는 것도 중요하고요. 보고 들은 만큼 내 세계가 커집니다.”
음악을 들으면 영화가 떠오르고, 영화를 보면 음악이 떠오르게 만드는 힘. 권현정 음악감독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공녀> 주인공 미소의 앞날을 떠올리며 작곡 한 'Happy new year, 미소'처럼 춘천의 내일을 반갑게 맞이하는 한마디로 인터뷰를 마쳤다.
“Happy new year, 춘천”
* 인터뷰는 요선동의 요싸롱(아날로그 음악을 청음할 수 있고 중고 음반 판매와 정보교류)에서 진행됐습니다.
** 악보계 교향악단이나 합창단의 모든 악보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 연주자들이 악보를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편곡하거나 만드는 역할을 한다.
★ 권현정의 플레이리스트 ★
1. 아이들의 잠수함 - 이병우
2. John Boy - Brad mehldau
3. House of Woodcock - House of Woodcock
4. Prelude In G Major - Vikingur Olafsson
5. Ravel: Piano Concerto in G Major, M. 83 - II. Adagio assai - Krystian Zimerman · The Cleveland Orchestra
6. Dinner Waltz - Alexandre Despalt
7. All my days - Alexi Murdoch
8. If You Rescue Me (Chanson des chats) - Jean-Michel Bernard
9. Punch Drunk Melody - Jon Brion
10.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 Conal Fowkes
11. Ylang Ylang - FKJ
12. Whiplash - Justin Hurwitz
13. BLACCK - Jon Bastie
14. Chameleon - Herbie hancock
15. All things - The Deli
16. We’ll Meet Again - Jonny Cash
17. Places We Won't Walk - Bruno Major
18. Without You - Tobias Jesso Jr.
19. It Might As Well Be Spring - Marian McPartland
20. Ring Dem Bells - Lionel Hampton & His Just Jazz All Stars
21. So Danco Samba - Getz Gilberto
22. Hable Con Ella - Alberto Iglesias
23. 영혼까지 기억되도록 (Eternal Memory) - 김현철
24. Dungen - Henrik Lindstrand
25. Truffles - Eugene Friesen
26. shiro, long, tail - Yoko Kanno
27. 마지막 돈키호테 - 조규찬
28. Águas De Março - Elis Regina & Antônio Carlos Jobim
29. Al otro lado del río - Jorge Drexler
30. Umimachi Diary - Yoko Kan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