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1
제 방 한편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습니다. 도쿄에서 아키타로 가는 비행기 표, 지푸라기 두 줄기, 어느 여름 들었던 깊은 산 사냥꾼 이야기,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날짜와 제목, 공연 순서에 맞춰 정렬된 플레이리스트, 지금은 단종되어버린 프링글스 뚜껑… 물건을 모으거나, 글이나 그림으로 남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나가는 순간들을 기록합니다.
수집 2
선착장에 모여 배를 타고 들어가던 중도 유원지를 기억하시나요? 중도는 중학교 때부터 주말이나 소풍 때마다 자주 들르던 곳이었습니다. 강을 건너 들어가면 닿을 수 있던 낯선 땅. 그곳은 넓은 잔디밭과 골대, 자전거 대여소 등 10대 소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요소들 만 모여 있는 곳이었죠. 우리는 온종일 공을 차거나, 캐치볼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나무 그늘 밑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뭐랄까… 크게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강 건너서 보이는 우리네 일상 공간을, 이 시간 누군가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그곳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오는 신선함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중도라는 작은 섬을 설레고, 특별한 공간으로 느껴지게 했습니다.
수집 3
제가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 우리 가족은 잠시 춘천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 여름이면 종종 춘천 내 특정 장소로 피서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월교 라는 이름이 있지만, 콧구멍다리로 더 익숙한 그곳입니다. 소양댐 아래에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거친 물줄기와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만 같은 나지막한 다리였죠. 푹푹 찌는 여름이면 그곳에 가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거나, 잠시 창문을 열고 그 부근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 뒤,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 우리는 끈적이는 여름밤이면 종종 이곳을 찾곤 했습니다. 여름임에도 몸이 떨릴 만큼 시린 공기 속에 불빛도 거의 없어 선명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쉬다가 오곤 했습니다.
수집 4
작업실 책장에는 똑같은 드로잉 북이 대여섯 권 정도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이젠 너덜거리는 검정 인조가죽 하드커버에는 색이 바랜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습니다. 그를 넘겨보면 2년 조금 안 되는 기간의 기록들이 담겨 있죠. 3박 4일 짧았던 여름 휴가의 이야기, 언젠가 가보고 싶은 바다 건너 저 먼 곳에 관한 짧은 글, 우연히 먹어보곤 반해버린 과자의 포장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나가는 순간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조금씩 남겨보려 합니다. 2023년을 살아가는 29살 김수영의 일상 속 순간들과 취향을. 춘천이라는 동네에 자리를 잡고 작업하는 한 청년작가가 느낀 감정들을. 언제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공허하지 않도록,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서 당신과 나의 춘천을 담아보려 합니다. 빠르게 바뀌고 지나는 일상 속 지난 순간들의 사건뿐 아니라 냄새, 온도, 소리 등 다양한 감각들까지 섬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도록 말이죠.
역행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 지난 순간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지점들이 있다는 것. 어쩌면 꽤 근사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김수영
회화작가. 1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탓에 표준어와 사투리가 섞인 억양을 쓰지만, 어엿한 15년차 춘천인.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만들어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