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학교들은 종업식(학교가 한 해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는 것)을 12월 말, 또는 1월 초에 합니다.
종업식을 며칠 앞둔 날, 한 아이가 종합장을 다 썼으니 새로 달라고 하더군요.
새 종합장을 내어주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이름을 써 주려는데 아이가 으스대는 표정으로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 1학년이라고 쓰지 말구 2학년이라고 써주세요.
저 인제 2학년 되니깐요. 알겠죠?”
그 말에 저도 놀라는 척하며 말했지요.
“아, 그래! 앞으로 3일만 더 오면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지?
알려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잘못 쓸 뻔했네.”
그걸 보고 있던 짝꿍 아이가 끼어드네요.
야, 니가 벌써 2학년이냐? 너 왜 2학년한테 까불라 그래.
싸가지없게!
그러자 그 아이도 지지 않습니다.
“야, 나 까불라 그러는 거 아니거든?
나 2학년 때도 이 종합장 계속 쓸 거야.”
듣고 보니 아이 말이 맞다고 생각했을까요?
아이들이 너도나도 종합장이며 학용품을 꺼내더니 제 책상 위 연필꽂이에서 사인펜을 꺼내다 1학년을 ‘2’학년으로 고쳐 쓰는 겁니다.
아이고, 녀석들이 마음을 벌써 2학년에 데려다 놓았나 보네요.
묘하게 안심이 되는, 좋은 징조입니다.
그날 점심시간. 메뉴로 나온 단호박 갈비찜을 평소보다 많다 싶게 받은 아이가 역시나 다 못 먹겠는지
다른 건 다 먹고 단호박만 남긴 채 제 쪽을 향해 목을 쭉 빼고 작게 속삭이더군요.
“선생님... 저 이 단호박 먹기 싫단 말이에요.
그니깐 이거 좀 남길게요. 알겠죠?”
그러자 그 얘기를 듣던 옆자리 아이가 퉁을 주네요.
“으이구, 아주 자알 헌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욕심쟁이처럼 많이 받으래?
다른 애들이 다 먹고 그네 타러 나가니깐
너도 빨리 나가서 놀라구 뻥치는 거 다 알어!
선생님, 쟤 다 먹고 가라 그래요!”
그러자 그 아이, 억울하다는 듯 얼굴이 벌개서 대드네요.
“야, 넌 상관쓰지(상관하지) 마.
나 원래 단호박 싫어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저를 향해 애원하는 겁니다.
“선생님, 2학년 땐 다 먹을 거란 말이에요.
오늘만 좀 봐줘요. 네?”
2학년 땐 다 먹겠다는 말에 저는 ‘그래? 알았어. 2학년 땐 다 먹을 거니깐.’
그러면서 그 아이 식판에서 단호박을 덜어다 제 식판으로 옮기는데 옆자리 아이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퉁을 줍니다.
“으이구, 선생님이 자꾸 먹어 주니깐 쟤가 자꾸 뻥치잖아요.
쟤가 2학년 때도 단호박 안 먹으면 어쩔라구 그래요?”
그 말에 제가 멈칫하며,
‘그런가? 2학년 때도 단호박 안 먹으면 큰일인데...’
그러자 아이가 굳은 표정으로 약속하듯 말합니다.
“진짜 먹을 거예요. 2학년은 형아가 되는 거니깐요.”
받아쓰기를 틀려도,
뺄셈 문제를 못 풀어도
아이들은 저에게 와서 2학년 땐 잘할 테니 한 번만 봐 달라고 합니다.
제가 '2학년 땐 잘하겠다'는 말에 껌뻑 넘어가 주는 걸 알고 능청을 떠는 거지요.
저는 일부러 불안한 표정으로 엄살을 떱니다.
“아이구, 그러다 니네가 2학년 때 잘 안 하면
내가 2학년 선생님한테 창피하겠네.”
그랬더니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단속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야, 니네 2학년 되면 진짜루 잘 해.
안 그러면 우리 선생님이 창피하니깐. 알았지?
선생님도 한 번 믿어 보세요. 2학년 때는 잘할 거니깐요.”
그러면서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2학년 땐 잘하자고 서로 말해주더군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이렇게 마음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합니다.
그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앞으로 더 잘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읽습니다.
낯선 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친구 사귀고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요?
역시 묘하게 안심이 되는, 좋은 징조입니다.
송주현
소양초등학교 교사.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 <착한 아이 버리기>, <초등학교 상담기록부> 저자.
32년째 아이들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