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여유 있게, 너무 애쓰지 않고
강원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강욱(57) 박사는 내게 ‘세월호 유가족과 오래 함께 한’ 사람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서 대학과 수련의 시절을 보낸 뒤 2001년 이후 춘천에서 의료인의 삶을 살고 있다. 학교와 병원 외에 춘천을 접촉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산과 호수를 만날 수 있어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습관처럼 평온과 고요함을 즐겼다는 그. 한적하게 걸을 곳이 많았던 춘천을 자신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향을 받아준 공간으로 ‘알아차렸다’고 술회했다. 대규모 재난이 더 이상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 절감되는 요즘, 스트레스와 우울의 공기를 매 순간 호흡하며 사는 지금의 우리를 그에게 묻고 싶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오랜 시간 상담을 해 오셨는데,
어디에 주안을 두셨는지요?
‘전문가로서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할 수 없이 강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더구나 집단으로 그런 일을 겪으면 충격은 기하급수로 커지지요.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난 뒤에 제가 한 일이라고는 분향소, 팽목항, 국회, 시청 앞 광장, 그 외 유가족들이 활동하던 곳을 방문해 그들 틈에 끼어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울분에 차서 무언가를 토로하면 묵묵히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맞추고, 간혹 눈시울을 붉히고, 어쩌다 그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조언의 충동을 간신히 누르면서 아무 말도,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밤늦게 전화를 걸어 답답함을 호소하며 간곡히 식사 초대하시는 걸 보면 그때 제가 한 치유의 방식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형 참사처럼 급작스럽고 참혹한 사고로 가족을 상실한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지름길이 있을까요?
지름길이란 말은 빨리 효과가 나타나고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네요. 빨리, 쉽게, 효과적으로, 같은 말은 문제를 해결할 때 동원하는 단어이고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회복되는 과정은 오히려 반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여유 있게, 충분히, 너무 애쓰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런 접근 방식이 자연스럽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되죠.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분노, 슬픔과 좌절, 그리고 죄책감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기간 동안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식입니다. 이때 주변 분들이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전하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상실을 표현하더라도 비난받지 않고 존중받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은 그 일 이후에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어쩔 수 없이 경험해야 하니까요.
많은 분야 가운데 정신의학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을 때 ‘우연’이라 대답한 그에게서 정신의학의 매력을 듣고 나면 ‘필연’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정신의학은 인간의 행동과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런 작동 방식이 신경계를 비롯한 신체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 인간은 어떻게 의식을 갖고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지, 자연에서 생명체로 다시 인간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흐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 세상과 생명에 관한 근본 질문으로 이끄는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심은 수많은 세포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한 개체가 자기의식을 확보한 후 자신 에게 벌어지는 생명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탐색으로 이어지죠. 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 측면에서 다양한 영향을 받는 인간의 마음을 공부하는 일은 끝도 없이 흥미진진합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와 같다”는 말이 상식이 되어 있는데,
우울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예방은 가능한가요?
드물지 않은 현상이란 점에서는 우울증이 감기라는 은유가 가능하지만, 경미한 증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감정(정서)의 일종인 우울과는 달리, 우울증(혹은 우울장애)은 우울한 감정이 일정 기간(최소 2주) 이상 지속되고, 다양한 동반 증상이 함께 나타나며, 그 정도가 사회적·직업적·일상적인 것에 지장을 줄 만큼 심한 경우를 가리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요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우울증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겠지만, 어느 정도 예방은 가능합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 - 적당한 운동, 식사, 수면 등이 기본적으로 중요하고요. 연구에 의하면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경험하는 것이 우울증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취미, 친목, 종교, 봉사, 공동체 활동 등 정기적으로 즐거운 경험을 쌓아 가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모든 긍정 정서의 토대가 되는 감정, 즉 감사와 자비(연민)의 마음을 덧붙이고 싶어요. 감사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 혹은 대상에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것이고, 자비는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거나 고통받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건 감사나 자비를 받는 상대보다 그 감정을 베푸는 사람에게 훨씬 더 큰 이익이 됩니다. 더불어 자신의 가치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면 몸과 마음, 환경이 힘겹다 하더라도 우울에 쉽게 빠지지 않고 용기와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찾는 것이 꺼려지던 시절에 비하면 많은 사람이
상담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실제 체감되는 게 어느 정도인지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살아온 게 30년 정도인데 이전과 달리 이제는 성별, 연령대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병원을 찾습니다. 아직 정신건강을 위해 병원을 찾는다는 것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부담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건 분명합니다.
진료와 강의만으로도 벅찰 텐데 맥락행동과학 연구회 활동을 비롯해 개인적으로
명상수련을 하는 등 여전히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계시죠?
연구회 활동, 명상 수련, 심리극 연출 등은 일차적으로는 모두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만 결국 제가 임상에서 진료에 적용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들입니다. 다양하고 풍부한, 깊이 있는 심리치료에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하니까요. 의사라는 본업에서 벗어난 과외 활동이기보다는 본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해보지 못했거나, 했지만 미진했거나,
혹은 충분히 해 봤지만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기존에도 많은 이론이 있었고 또 새로운 이론도 수없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임상 현장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요. 증상이나 환자의 특성, 현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모듈형으로 다양한 심리기법을 갖춘 포괄적 심리치료팀을 구축할 수 있으면 좋겠고, 이런 치료 체계를 효과적으로 교육하여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는 수련 시스템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견디기 힘든 일을 일상적으로 맞닥뜨릴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일단 병원부터 찾아가야 할까요?
우선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찾아가 어려움을 털어놓고 이해와 위로를 요청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누군가로부터 진심 어린 이해를 받고, 다른 사람도 비슷한 어려운 경험을 하고 있음을 공유하는 것은 분명 위로가 될 겁니다. 혹시 괴로움이 너무 심각해 생활에 지장이 생기거나 괴로움을 피하려는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더 힘들게 한다면, 또는 어디서도 심리적 도움을 받기 어렵다면 기꺼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죠.
진료를 계속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 동료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합니까?
물론입니다. 스스로 심리적으로 갇혔다고 생각되면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료에게 자문합니다. 믿음직한 몇 명의 후배가 있고, 도움을 청하는 종교인도 있습니다. 꼭 필요한 과정 입니다.
진료 과정에서 만나는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가장 자주 얘기하는 말은 문제가 무엇이든 당장 생명이 위급한 게 아니라면 서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급하면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습니다. 악수를 거듭하면서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정말 급박하다고 느껴지면, 완전히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날 여유가 필요합니다.
강원도광역자살예방센터를 맡기도 하셨는데,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때 이른 죽음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삶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던 거죠. 각자 사연이 있겠으나 마지막 결정은 사회에서 연결된 존재가 있느냐, 자신의 존재를 사회가 원한다는 확신이 있느냐의 여부로 이루어집니다(토머스 조이너). 결국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거죠.자살자는 개인의 나약성으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응당 위로와 지지, 고마워해야 할 대상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살자 몫을 생존자가 나눠 가졌다고 하면 무리일까요? 공동체의 회복 없이 개인의 회복은 없습니다(카이 에릭슨).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이론을 소설로 펼쳐내는 듯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고, 얼핏 결점이 없어 보이지만 “꾀를 부리지 않는 순수함, 많은 걸 포용하는 관용능력, 수치심을 이기는 용기, 모든 이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겸손함, 타인의 장점을 세심하게 발견할 수 있는 혜안 같은 것을 갖고 싶은데, 이런 덕목이 결여된 자질을 삭제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음악·미술·댄스·연극·문학·영화·요가 등 인간이 개발한 모든 다양한 예술적·인문학적·명상기법이 융합된 방식의 공연이 펼쳐지는 상설 공연장의 운영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곳에선 참여자가 공감과 자비를 통해 타인과 깊은 수준에서 연결감을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의사와 교수가 아닌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는지를 물었을 때 돌아온 그의 대답이다. 부디 그의 꿈이 실현되어 공연장을 찾는 모든 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그래서 살아 있음이 진정으로 축복임을 느낄 수 있기를, 빌어본다.
* <하창수의 사람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 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