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읽은 책> 캔버스에 오일, 정상명
<봄내>에 연재해오던 ‘녹색이야기’는 1년 약속이었으므로, 이번 글이 마지막 글이다. 시의 편집 담당자 김선순·한수지님은 늘 원고를 받기 전에 그들 업무의 일환으로 “다음 호는 어떤 주제를 다룰 것인가”하는 질문을 해오곤 했다. 편집회의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문자를 받자 얼른 떠오르는 대로, “다음 호에는 ‘환경문제는 인간의 탐욕의 문제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 급하다’… 그런 얘기들로 마지막 지면을 채울까 합니다”라고 답신했다.
그리고 며칠 뒤, 시청앞 카페에서 다른 편집 담당자 안선희 님을 만났는데, “선생님 다음 호 주제가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런 반응에 조금 놀라면서도 새로운 발견의 감정을 느꼈다. 아아, 사람들은 지구온 난화나 기후재앙이니 하는 골 아픈 주제보다는 ‘괜찮은 인간’에 대한 갈망이 있구나, 하는 발견 말이다.
소로도 “인간이 천박하다면 아름다운 자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저 월든 호수에 오두막 짓고 2년여 실험적으로 살았던 야생 예찬론자 소로만 떠올리기 쉽지만, 소로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천박을 혐오했고, 인간의 품위를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기도 했다. 소로의 말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자연이 우리의 삶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실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괜찮은 사람’의 정의도 사람마다 달리 규정할 수 있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개념이긴 하다. ‘천박’이라는 고약한 표현도 ‘비천’과 ‘경박’의 평가나 범주가 사람마다 달리 내릴 수 있는 일이므로, 깊이 따지고 들어가기 어려운 면이 있다. 소로의 시대는 아직 자본주의가 일상화되기 전의 시대였으므로 그가 말한 ‘천박’과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천박이 같을 수도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한 사회가 어떤 가치관을 신봉하든, 인간이 지녀야 할 본래적인 격과 품위는 어느 곳에서나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천박에서 벗어나 품위 있는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있을까.
18년쯤 춘천에 살았으므로, ‘1시민’으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는 것으로 이 귀한 연재를 허락한 데 대한 인사로 삼을 생각이다. 며칠 전 나이 든 지인을 만났더니, 지니고 있던 책 서른 박스를 버렸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의 지인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평생 아끼던 책들, 책이 곧 내 인생이었는데, 자식들도 그 책을 받을 수 없고, 대학은 땅 투기는 많이 한다고 하더구만, 책을 받지 않어. 대학마저 공간이 없다고 책을 거부하다니, 말이 되는가. 이 책들이 갈 데가 없어. 어쩌면 내가 버린 책들 중에도 귀한 책들이 있을 수 있잖어. 나 같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어? 종이책 시대가 지나갔다는 게 바로 종이책을 살려야 할 이유가 되잖어. 고민하다가 내 생을 버리는 심정으로 서른 박스를 폐휴지상에 내놓았어. 책 읽고 산 내 인생이 마치 실패한 인생 같아서 슬프네.”
사실 이 노인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는 우리 삶의 과도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지구온도가 오르는 일도 불안하지만, 책들이 버려지는 일에서도 격한 통증을 느낀다. 학자나 문인이 아니더라도 책과 같이 생을 품위 있게 살아온 독서가들이 만년에 지니고 있던 ‘책의 양’ 때문에 자신의 삶을 회의하게 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이참에 춘천에 이 나라에서 버려지는 책들을 모두 담을 거대한 ‘기증책 도서관’을 건립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태어나자 A4 한 장 넓이에서 잠시 살다가 닭갈비로 변하는 명품 먹을거리에 의존해 사는 것도 좋지만, 춘천이 우리나라에서 전례 없는 ‘책마을’이 되기를 소망한다. 꼭 영국의 책마을이나 프랑스의 리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기증된 책들이 끝없이 화제를 일으킬 것이고, 제멋대로 남용되는 ‘문화’라는 개념이 무엇보다 책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확고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춘천에 가면 세상의 모든 책들을 기증받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대! 멋있지 않아? 가서 닭갈비도 먹고, 호숫가도 걷고 그러자.”
다른 곳으로부터 이러한 부러움을 받는 것이 한 도시의 진정한 자산이 아닐까, 삼림을 파괴해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하고 폐수를 배출하기 십상일 공장유치 등의 하드파워로 경제를 살리려고 할 게 아니라, 흐르는 강물, 맑은 하늘의 한가로운 구름, 느리게 사는 삶, 세상의 모든 책이 다 모이는 도서관, 나무에 앉은 새떼들, 쫓기지 않는 얼굴들로 상징되는 소프트파워로 경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질 좋은 삶’을 선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환경문제는 인간의 무교양과 천박에 탐욕이 가세해서 야기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산업혁명 이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후의 궁핍에서 신속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되었다. 분명 과실(果實)을 얻었으나 고르게 나누어지지는 않았고, 폐해는 얻은 것을 초과하고 있고, 우리네 삶은 더욱 황폐해졌다. 과잉산업화 세력은 산천을 파괴하고 잇속을 차렸지만, 망가진 자연에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하자면 그 도구로서 책보다 나은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버려지고 있는 전국의 귀한 책들이 춘천에 모두 모일 수 있는, 아직 이 나라에 한 곳도 없는 ‘기증책 도서관’이 이 아름다운 도시에 하나쯤 건립되기를 한 책벌레로서 마음 깊이 소망한다.
(별로 즐겁지 않은 녹색이야기를 1년여 애독해주신 시민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 <최성각의 녹색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산들바람 산들 분다』,『나무가 있던 하늘』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