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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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82

2022.11
#봄내를 품다
허준구의 춘천백경 ㉓
성재봉과 정이주
모두 취한 세상에 홀로 깨어 있어 성재봉이라네

성재봉과 눈늪 전경



『조선왕조실록』에 ‘중국 사신이 오면 금강산을 꼭 보고싶어 하며, 고려에 태어나 몸소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기록이 있을 만큼 금강산金剛山!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이름이다. 금강에는 ‘번뇌를 끊는 지혜’ ‘몹시 단단하여 결단코 부서지지 않음’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이란 뜻이 담겨 있다. 


춘천의 금강 

김영하는 『수춘지』에서 춘천에 세 개의 금강金剛이 있다고 하였다. 석금강石金剛 수금강水金剛 토금강土金剛인데, 석금강은 삼악산三岳山이고 수금강은 곡운계곡谷雲溪谷이며 토금강은 성재봉醒齋峯이다. 성재봉은 토금강답게 굵은 모래처럼 보이는 마사磨沙에 붉은 계통의 진흙이 섞여 이루어진 얕은 봉우리다. 


성재봉은 서면 금산초등학교 인근에 있으며 언뜻 보면 산봉우리로 인식되지 않을 만큼 얕은 구릉이다. 성재봉 앞쪽에 자양강이 중도를 사이에 두고 소양강과 짝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 의암댐이 생기기 이전부터 성재봉 앞쪽 금산리에는 나루가 있었고 이 나루 곁에는 눈늪(臥濱와빈)이 있었다. 눈늪을 포함한 금산리 일대는 안정효 소설『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성재봉 아래 자양강가에는 우양리 전설이 있으며 봄내길과 의암호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처럼 토금강 성재봉 주변에는 많은 옛이야기가 있기에 성재봉에 대한 유래가 더욱 궁금하다.  


홀로 깨어 있는 마음의 집, 성재봉 

성재봉醒齋峯에서 ‘성재醒齋’는 사람의 이름을 대신해서 부르는 호號에서 유래하였다. 즉, 성재醒齋는 조선시대 최고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정치를 실행한 관료이자 평생 올 곧음을 몸소 실천한 선비 정이주鄭以周(1530~1583)의 호이다. 성醒은 술에 취하지 않고 깨어 있다는 뜻이고 재齋는 통상 집이란 뜻이지만 사람의 호로 쓰일 때는 ‘마음(의 집)’ 이란 뜻이다. 


굴원屈原은 『초사楚辭』를 지었는데, 그 책에 다음과 같 은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며, 세 상 사람이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擧世 皆濁我獨淸 거세개탁아독청 衆人皆醉我獨醒 중인개취아 독성)” 


정이주는 굴원이 언급한 구절의 마지막 글자인 ‘성醒’자를 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이주는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취해 있더라도 나는 홀로 깨어 있겠다는 뜻을 마음에 두고자 ‘성재醒齋’라는 호를 취하였다. 


금강처럼 굳은 뜻으로 살아간 성재 정이주 

성재 정이주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춘천 사람들은 그의 호를 취하여서 봉우리 이름으로 삼았던 것일까? 성재에 대한 당대 평가는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지은 묘지명과 신도비명에 잘 드러난다. 성재는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을 지냈던 경력이 있으며, 성재의 5대조 정귀진鄭龜晉이 강원도 관찰사로 문명文名을 세상에 떨쳤던 즈음에 춘천과 연고를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눈늪과 자양강 상중도 봉의산 



눈늪 일부와 성재봉 원경 



상촌은 묘지명에서 “공이 전후 세 번 정언正言이 되었고, 네 번 퇴폐해진 기강이 엄숙하게 되고 관료들이 두려워하는 데가 있게 되었으나 끝내는 이러한 것으로 배척당하였다”라고 하였고 “마음가짐은 활줄처럼 곧았고 몸가짐은 물과 같이 청결하였으며, 궁달窮達과 세리勢利로 인해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니,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완전한 인재가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하였다. 


성재는 올곧음 때문에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하급 관료로 일생을 마쳤으며, 여기에 하늘도 수명을 늘려주지 않았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춘천에서 보내려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더러운 세상을 피하여 청결한 몸가짐을 지키며 궁달과 세상 명예에서 벗어나 금강처럼 굳은 뜻을 지켜내기에 이곳이 최고의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성재 정이주는 만년에 춘천 서면 금산리 성재봉 아래에 머물렀다. 성재봉에 오를 때마다 강 건너 고 산을 바라보고, 평생을 방랑하면서 세상을 멀리했던 매월당 김시습을 떠올리며 생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성재봉은 후학들에 의해 토금강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금강이 담고 있는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이 성재의 삶의 궤적과 일치하기에 붙여졌으리라. 이러한 연유 때문일까? 성재봉에서 바라보이는 ‘박사마을 선양탑’이 한 층 다감하게 느껴진다.  






글 허준구

문학박사. 춘천학연구소 소장. 일찍이 춘천학에 관심을 갖고 춘천의 역사와 문화에 집중해 왔다. 

특히 천혜의 춘천 자연환경에 문화와 역사의 색을 입히는 데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