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영희 명예시민사진기자
‘남녀’가 아닌 ‘사람’을 위한 활동
세상의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버릇을 가진 ‘이분법주의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대립과 대결로 하루해가 뜨고 지던 세상을 풍자하기 위해서였다. 10년쯤전이 지만,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안은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성숙한 인식과 포용을 필요로 하는 젠더갈등의 해결은, 과장을 좀 보태면, 바라는 것조차 어렵다는 의미그대로의 난망難望이다. 지난해까지 4년여 춘천여성민우회 대표를 역임한 정윤경 씨(49)는 이 난제를 일상의 숙제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활동가로 시작해 소모임장, 운영위원, 대표를 두루 지낸 여성운동가.
남녀 간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젠더활동’은 그의 독서심리 전문상담사 명함에는 쓰여 있지 않다. 하지만 현장에서 연대하고 위로할 수 있는 동지를 만나는 젠더활동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수시로 힘에 부치고 좌절을 안겨주지만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솟는다. 이즈음 그를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한국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여성 대상 각종 폭력 사건의 재판이 열리고 있는 춘천 지방법원. 그가 하는 법정모니터링은 재판을 지켜보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연대해 법정을 지킨다. 가해자에 대한 엄벌 탄원서에 서명을 받아 엄정한 재판을 위한 의견서와 함께 법원에 제출하고, 기회가 되면 1인 시위도 한다.
“항소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고 대법원에서도 승소해 피해자로부터 감사의 메시지를 받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져요. 자신도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과 연대하는데 힘쓰고 싶다는 피해자의 말을 들을 땐 제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법정 모니터링으로 피해자와 함께한 시간도 어느새 1년을 훌쩍 넘겼다.
책을 함께 읽으며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사람
본업인 독서심리 상담 일만으로도 정윤경 씨의 일과는 꽉 차 있다. 2011년 독서치료학회의 심리치료 과정을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만큼 빡세게 이수한 그는 10년 넘게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다녔다. 관심사병들이 기다리는 군대로, 재소자들을 찾아 교도소로, 상담이 필요한 학생을 만나러 학교로. 최근엔 치매 초기의 노인들을 대상으로도 책 읽기를 통한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한 주의 나머지 날들은 피상담자들의 고충을 덜기 위한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준비하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그 바쁜 와중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시행하는 성폭력·성희롱·가정폭력 예방 통합교육 강사라는 이력이 하나 더 붙었다. 이것도 모자라 두어 달 전엔 <여성신문> 강원지사장 겸 기자라는 명함까지 새로 찍었다.
과부하가 걸릴 만한 그의 일상에 균형을 잡아주는 게 궁금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린 자신에게 거는 주문은 실은, 그들에게 해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오늘·현재에 집중하자는 얘기를 많이 해요. 저 자신에게나 그분들에게나 마찬가지예요. 힘든 일이라는 것이 대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과거에 대한 회한,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한 불안이잖아요. 결국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의 ‘나’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게 관건이죠.”
오리건과 떠나는 여행
크든 작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얘기 나누는 일에서 그는 ‘함께’에 방점을 찍으며 비와 우산의 비유를 들었다.
“함께한다는 건,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버리고 같이 비를 맞는 거죠.”
그러고 보니 그의 파스텔톤 명함 뒷면에는 빨간 목도리를 한 곰과 단발머리의 여성이 몸을 맞댄 채 ‘함께’ 책을 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낯익은 모습의 그 곰은 바로 그녀의 온라인 닉네임이기도 한 오리건이다. 5년쯤 전, 서커스단의 난쟁이 어릿광대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이 잃어버린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담긴 라스칼(글)과 루이 조스(그림)의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에 사로잡혔던 그는 자신의 명함에 ‘오리건의 마음 여행’이라고 새겼다.
‘오타쿠’ 기질이 있어서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음에도 호기심이 생기는 일에 잘 빠져들어 제때 빠져나오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그.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만나며 써 내려간 『인생수업』을 애정하는 그. 가장 중요한 시기를 가장 힘들게 살아가지만 젠더 의식을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1020 여성들과의 연대를 위해 ‘달빛여자축구단’을 창단한 그.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축구를 시작했듯 성性평등한 세상을 위해 젊은 이들과 더 많이 소통하고 싶다는 그. 저마다의 우산을 버리고 ‘오리건’ 윤경 씨의 긴 여행에 함께 비를 맞아줄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 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