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면 삽상한 가을바람이 머리카락을 빗질한다. 높푸른 하늘이, 가을빛 짙어 가는 단풍 숲이 절로 발길을 잡아당기는 계절이다. 숲은 가장 아름다운 낙하를 준비하는 나뭇잎들로 수런거리며, 저마다의 가을빛을 토해낸다. 그 숲 속으로 자박자박 들어서면 해동무로 먼 길을 걸어도 좋을 때다.
공지어가 살았다는 공지천
공지천 산책로
춘천교육대학교 정문을 나와 석사초교 오른편으로 나가면 공지천 산책로가 이어진다.
공지천은 곰짓내(곰진내)로 불렸던 곳, 대룡산 자락 곰실(고은리)에 있는 풍광이 뛰어난 ‘수려간水麗澗’(수레간, 수뢰간)이 발원지로 알려졌다. 그러나 발음하기 좋은 수뢰간으로 불린다. 폭포는 맑은 샘이 솟구쳐 흘러 절벽 틈새로 3단으로 쏟아진다. 전체 높이 15m 정도의 폭포와 맑은 계곡으로 인해 예전에는 주변 학교에서 단골로 소풍을 오던 곳이다. 발원지 옆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담긴 묘역이 있어 넓은 공간도 있다. 계곡 옆으로는 과수원이 있고 계곡 아래로는 농가도 있다. 한여름이면 아는 사람만 찾아 오는 숨은 피서지다. 수려간 폭포를 지난 물줄기는 학곡(두름실)천과 만나 석사(벌말)천을 이루며 공지천에 몸을 적시고 삼천리에서 신연강을 만나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공지천 산책로는 퇴계동과 석사동 물길을 따라 4.8km로 조성되었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아 산책로를 이용하는 주민들이 항상 붐비는 곳이다. 근래엔 산책로에 터널을 이용한 산책로 연결 수로박스(300m)를 조성(후하천-석사천), 여름철 피서 공간이자 사진이나 그림 전시 장소로 활용해 시선을 끌고 있다. 산책로 2km 구간에는 LED가로등을 설치, 야간 보행에도 편리하다.
수로박스에는 춘천의 풍경사진과 예전 유명 영화간판들이 전시돼 있다. 맑은 물길을 따라 징검다리와 갈대숲, 꽃밭이 곳곳에 있어 지역주민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원정 산책을 오는 곳이다.
공지천은 퇴계 이황의 어머니가 춘천 박씨이므로, 그가 어려서 외가인 퇴계동에 왔을 때 밥상에 먹을 생선이 없자 용왕이 준 지푸라기를 잘라 개울에 넣었더니 맛있는 ‘공지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곰짓내~공지내~공지천孔之川으로 불렸다고 한다.
안마산 정상에 서면 시내가 한눈에…
춘천은 삼악산(654m), 금병산(651m), 대룡산(899m), 북배산(869m) 등이 외사산으로 둘러 있으며, 그 안에 진산인 봉의산(301m)을 비롯, 안산인 향로산(315m) 그리고 안마산(303m), 드름산(357m) 등이 내사산으로 둘러 있는 아늑한 분지형 마을이다. 서울의 내사산(북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에는 한양도성이 18.625km 연결돼있다. 춘천봄산이 둘레길은 애막골-안마산-국사봉-드름산-의암호-봉의산을 잇는 약 35km다. 도성은 없지만 전망대 역할을 하는 안마산, 의암봉, 봉의산이 있고 의암호를 끼고 도는 윤슬길이 있다.
안마산鞍馬山은 퇴계동과 동내면 정족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말안장과 비슷한 생김새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또 춘천 안쪽에 있어 안화산, 아내산, 아나산이라고도 부른다. 안마산 아래 동쪽 마을인 학곡리는 두루미 서식지가 있었다는 두룸실(학곡리鶴谷里:학의 우리 이름)이다. 실레마을(증리甑里)에 살았던 김유정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유정은 어렸을 때 실레마을에서 두룸실로 걸어 다닌 기억을 남기기도 했다. 공지천 산책로를 건너 우리소아과~대룡중학교 쪽에서 안마산으로 오를 수 있다. 안마산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펼쳐지는 춘천시내 조망에 감탄하게 된다. 한눈에 들어오는 춘천시내 풍경과 봉의산, 소양강이 보여 전망대 역할을 하며 오른편으로는 대룡산 산주름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정상에는 여러 가지 체육시설이 설치돼 있다.
안마산은 춘천의 동쪽마을로 학곡리(두룸실)나 석사동(벌말), 정족리(솥바리), 퇴계동(무릉계), 증리(실레) 등에서 오르는 다양한 산책로가 있으며, 코스
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보통 왕복 2.3km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안마산 산책로
(좌)국사봉 망제탑, (우)국사봉 오솔길
대룡중학교나 농공단지 입구 편의점 쪽에서 출발해 정상에서 춘천시내를 발아래 펼쳐 보고, 내려올 때는 춘천장애인복지센터(옛 중앙병원) 쪽으로 내려오다 샘터가 있는 옆길로 들어서면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다시 편의점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온다.
이곳에서 길을 건너 홈플러스 쪽 인도를 따라 내려가면, 홈플러스 길 건너 전철 교각 아래 국사봉으로 오르는 좁다란 산책로 들머리가 나온다.
춘천 선비의 표상 국사봉 망제탑
춘천 도심의 동남쪽에 자리한 금병산은 병풍처럼 드리워 춘천을 품어준다. 금병산 자락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안마산으로 줄기를 드리우고, 안마산 줄기는 다시 완만하게 서쪽으로 낮아지며 국사봉에 이른다. 국사봉 줄기는 서쪽으로 향로산에 이어지고 향로산 줄기는 두 갈래로 나뉘어 봉황대와 부벽정에 이르러 그 여정을 멈춘다.
향로산은 봉의산과 마주한 춘천의 안산安山이고 안마산은 가볍게 등산하기 좋은 말안장 모양의 산이다. 이렇듯 국사봉은 안마산과 향로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국사봉은 나라 국國 선비 사士 봉우리 봉峯 자로 지어졌고, 여기서 국사國士는 온 나라 사람들이 높이 떠받드는 지조 있는 선비를 일컫는 말로, 애국지사愛國志士의 준말이다. 국사봉에는 산 이름에 걸맞은 춘천 선비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국사봉은 퇴계동에 있는 높이 203.3m의 야트막한 봉우리로, 춘천 선비의 나라 사랑 정신이 짙게 서려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1월 22일에 대한제국의 황제로 백성의 희망이자 기둥과 같았던 고종이 승하하였다. 그러나 춘천 어느 곳에도 마음 놓고 슬퍼할 장소가 없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슬픔을 토로하고 황제의 제사를 지내며 독립을 염원하고 선비의 지조를 지킬 장소로 국사봉을 택했다.
당시 춘천의 선비 200~300인이 국사봉에 올라 소나무 아홉 그루를 심어서 대한제국의 상징인 태극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태극단은 당시의 고난을 이기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겠다는 광복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국사봉에 태극단을 만드는 일은 김영하 선생(1879~1956(?), ‘수춘지’ 저자)이 주도하였고 여기에 뜻 있는 춘천의 선비 200여 명이 힘을 합쳤다. 국사봉에 소나무 태극단이 설치 되자 춘천의 선비들은 앞다투어 국사봉에 올라 제를 올리고 조문과 시문을 지어서 독립의 필요성과 일제의 만행을 기록하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 일제는 글을 지은 선비들을 투옥하여 고문하며 선비의 지조를 꺾으려 했으나 3년 상이 끝날 때까지 선비들에 의해 망제는 면면히 이어졌고 글
도 함께 지어져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3년 춘천시에서 선비정신을 기려 ‘국사봉망제탑國士峯望祭塔’을 세웠다. 지금은 소나무 태극단은 사라졌고 탑만 남아있다.(봄내, 허준구의 춘천 100경 참조)
망제望祭는 먼 곳에서 조상의 무덤이 있는 쪽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고종 황제가 계신 한양(서울) 땅을 향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탑 옆에 새겨진 시비에는 16분의 조문과 시가 빼곡하다. 이 중 김영하 선생의 시는 통한의 슬픔을 간결하게 함축했다. ‘하늘을 부르며 임금께 곡하니/ 오백년 조선의 역사가 눈물짓고/ 삼천리 온 나라가 눈물 뿌리자/ 귀신도 함께 눈물 흘리는구나.’
망제탑 건립에 참여했던 고故 최승순 강원대 교수는 “국사봉 정상은 강원지역에서 유일하게 국상의 슬픔을 비와 탑에 새겨 남겨 놓은 곳”이라고 했다.
흰 차돌바위 서 있는 백석골
국사봉은 어느 쪽으로든 1km 남짓 거리로 왕복 1시간이면 여유롭게 솔바람 소리를 벗하면 슬렁슬렁 산책길을 더듬을 수 있다. 상크름한 솔향과 따사로운 가을볕이 온몸으로 스민다. 걷기 좋은 조붓한 흙길이다. 솔잎이 쌓인 오솔길은 발바닥이 폭신하다. 걷다 보면 소나무 뿌리가 불끈 얼크러진 길도, 나무 받침 오르막길도 만난다. 봉우리에선 망제탑이 기다린다.
산책로에는 항상 산책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산 아래 어린이집 유아들도 오전에는 가볍게 산길을 오른다. “애기야~” 부르니 “나 애기 아니에요” 또박또박 못을 박는다. 선선한 가을 향기 속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토실토실 여물어 간다. 날머리 산자락엔 길손을 반기는 예쁜 카페들도 안겨 있다.
백석골 입구 표지석
국사봉에서 온의동으로 내려가면 흰바위가 있는 백석골 들머리다. 마을 초입에 하얀 차돌바위가 있어 백석골로 불렸다고 하는데, 사라졌던 바위白石를 땅속에서 파내 근래 다시 세워졌다. 백석골 안쪽으로 들어가 산길(해솔직업사관학교 뒤)을 오르면 칠전동 라데나골프클럽으로 가는 능선길, 울타리길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