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형재
여우고개를 아십니까
우두벌엔 여우고개가 있다. 그 여우고개는 신북읍 너른들과 우두동 들판을 넘나드는 관문 역할을 한다.
사실 신북읍 샘밭과 우두벌은 청동기시대의 맥국이었다. 맥국貊國은 6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성읍국가였다.
춘천에선 지석묘가 제일 많이 출토된 곳으로 샘밭과 우두벌을 꼽는다.
지역 역사가들은 샘밭을 맥국의 터로 획정劃定하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샘밭을 가려면 우두벌을 지나 여우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두 지역이 맥국의 영역이 되는 셈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다만 예부터 춘천 고대사의 근간이 되는 이 터는 씨앗을 심고 가꾸는 최적의 평야로 춘천의 중요한 젖줄이 되어 왔다.
인제에서 내려오는 소양강 줄기는 우두벌의 우두산을 감돌아 봉의산에 닿는다. 서북쪽에서 흘러드는 북한강 물은 역시 봉의산에 닿아 소양강 줄기와 만나면서 큰 강을 이룬다. Y자 형태로 만난 이 큰 강의 줄기를 옛사람들은 대바지강이라 불렀다.
깊은 계곡의 두 강줄기가 홍수로 범람하면 많은 토사를 실어 온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하류는 흙과 모래로 퇴적되고 비옥한 평야를 이룬다. 이것을 충적평야라 이름한다. 땅은 기름지고 부드럽다. 무엇을 심어도 풍작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마을이 생겨나고 더 큰 마을이 조성된다. 이런 마을의 집단을 성읍국가라 부른다.
우두벌은 그렇게 만들어진 평야다. 우두벌엔 신동이 있고, 우두벌엔 사농동이 있고, 우두벌엔 우두동이 있다. 이 세 동을 합한 것이 신사우동이다.
아파트 서기 전 우두벌. 사진 이수환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처럼 신사우동도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곶처럼 튀어나온 지역은 신사우동에서 가장 번잡한 지역이다. 소양2교를 통해 사람들은 우두벌과 춘천 중심가를 넘나든다.
이 지역은 우후죽순 아파트들이 삐죽삐죽 솟아나 강변은 모두 아파트 숲으로 무성하다.
상가와 비좁은 골목은 저녁이면 휘황한 불야성을 이룬다. 이제 의암댐으로 하여 대바지강은 호수가 되었다. 지금 대바지강의 물줄기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중도는 강변 마을로 선사시대 혈거지穴居地였다. 작년 레고위락단지가 조성되면서 그 중요한 사적지는 파괴되었다. 이제 중도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성에 짓눌린 고립된 섬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지금 나는 신사우동 마장천 하류에 있다.
가마우지 떼일까. 검은 새들이 다리 상판이 사라진 교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마장천 하류는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둥그런 반달형 다리가 세워지고, 다리 아래엔 연꽃 무리 들이 피었다 졌다.
아래쪽 하류 호수 안엔 버드나무 섬이 물에 잠긴 채 묵상 중이다. 멀리 서면이 건너다보인다. 삼악산은 가을빛으로 물드는 중이다.
하늘은 회색과 흰 구름 떼가 점령하고 있고, 그 구름들이 호수에 넓게 퍼져 있다.
호수의 하늘일까.
하늘의 호수일까.
마장천 하류 반달다리
아카시아꽃 필 무렵인 5월엔 이 마장천 하류로부터 상류까지 온 개울이 희디흰 거품으로 부글거린다.
산란철을 맞아 의암호의 붕어 떼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덩달아 한 자가 넘는 잉어도 몰려든다. 가장 장관인 그때가 되면 손으로도 붕어와 잉어를 움켜쥘 수 있을 지경이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옛말이 되었다.
‘공사중’은 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대개는 물고기와 수생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기가 십상이다.
춘천도매시장 외부
토마토농장 골목 입구와 알토마토 비닐하우스
토마토 비닐하우스엔
마장천을 거슬러 오르면 거대한 건물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 농산물도매시장과 수산물시장이 있다.
농산물도매시장에선 우두벌과 샘밭에서 나는 과일과 채소류, 알곡들이 거래된다.
특히 이 도매시장은 늦봄부터 시월까지 토마토가 집중 출하되어 전국에 나간다.
소양강 토마토, 소양강 사과, 소양강 오이 등 채소는 품질이 좋기로 전국 제일이다. ‘소양강’ 글자가 새겨진 상자만 보면 무조건 인정을 받는다. 소양강은 춘천의 자랑스러운 브랜드가 되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값을 제대로 쳐 받는다.
우두벌은 3만여 평의 토마토 비닐하우스가 설치되어 토마토가 자란다. 토마토가 끝나면 방울 토마토를 기른다. 올망졸망 수억 개의 방울이 별처럼 조롱조롱 열린다.
50대의 농부가 알토마토를 따면서 이렇게 말했다.
“밤만 되면 비닐하우스들엔 수억 개의 전구알이 켜져요. 소양강 토마토는 별토마토예요. 이 우두벌은 온통 환한 별천지죠.”
캄캄한 우두벌 비닐하우스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얼마나 문학적인 표현인가.
나는 그 주인을 토마토 시인이라 불러주었다.
달 따는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이 이곳에 온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정말 수억 개의 반짝이는 토마토 별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의 사진작가는 환한 비닐하우스를 찍느라 온밤을 꼬박 지새울 게 틀림없다.
아내와 나는 허허벌판이던 우두벌 비닐하우스 골목을 걷는다. 배추와 들깨가 자라는 채마밭 건너 저쪽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휴대폰 모양의 얇은 아파트가 눈부시게 빛난다. 비옥한 땅이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또 얼마의 아파트가 이 드넓은 평야에 세워질지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올해 아카시아꽃 필 무렵 이곳에 왔을 때는 미완성의 아파트들이 다투어 자라고 있었다. 지금도 완성된 아파트 옆으로 자꾸만 새 아파트가 벌판에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식물처럼 자란다. 아프리카의 바오밥나무처럼.
독수리 허수아비
갑자기 독수리 두 마리가 나타났다.
독수리들은 들깨밭을 스치면서 낮게 선회한다. 아내와 나는 긴장하여 우뚝 발걸음을 멈춘다.
가만히 보니 허수아비다. 독수리는 하얀 끈에 매달려 있었고, 바람이 불면 저렇게 솟구치고 하강하기를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아, 이런! 허수아비도 이렇게 진화했구나.
얘들아, 점심은 먹었니?
우린 웃으면서 두릅나무 무성한 모퉁이 길을 돌아, 근처 ‘콩이랑두부랑’ 집으로 갔다.
소양강에서 자란 콩으로 두부를 빚는 집. 상상이 풍부하여 우주선 타고 별나라를 몇십 번이고 여행한다는 주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벽엔 몇몇의 시인이 쓴 두부 예찬시가 멋지게 걸려 있다. 12시가 되자 100여 석이 어느새 꽉 찼다. 소양강에서 난 콩으로 소양강 두부를 빚는 이 집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유명 맛집이다. 지인 두 분을 전화로 불러 넷이서 두부짜박이와 청국장을 시켰다.
나는 손님들을 모시고 이곳을 자주 찾는다. 그러면 모두 하나같이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분들 눈빛이 별같이 반짝이는 건, 소양강 두부가 행복을 주었기 때문일까.
우두벌 아파트촌
새로운 인류가 되는 꿈
배불리 먹었으니 함께 식사한 지인들과 거리를 걷기로 한다. 키를 다투듯 새로 선 아파트촌은 깔끔하고 고적하다.
널찍한 네거리 모퉁이, 연두색 파라솔 밑에 서 있는 두 여성을 우린 스쳐 지나간다. 아기차를 몰고 나온 젊은 주부가 학습지 판매원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우린 네거리 백다방 커피점에서 차를 시켜 마시며 거리를 내다본다. 한적하고 쾌적하고 마냥 여유롭다.
아파트 숲 사이 사이로, 열심히 아파트가 자라고 있다.
우린 네거리 모퉁이 찻집에서 새로운 인류가 된 양, 맛있게 커피를 마신다. *
최돈선 시인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