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령 옛길 가는길
당림리와 당숲 이야기
안보리에는 말을 관리하는 역驛이 있었고 이 역에는 역마驛馬 여러 마리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 역마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석파령을 넘기 전 반드시 지나야 했던 당림리 당숲(당림堂林) 앞에 이르러서는, 부리는 마부의 말을 듣지 않으며 항시 등에 탄 사람과 짐을 땅에 부리도록 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어 말은 당숲 안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서야 석파령을 넘었고 돌아와서도 똑같이 행동하였다고 한다.
말이 당 숲 안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린 까닭은 할미 말을 위해 그곳에 절을 하다 관원에게 맞아 죽은 어미 말을 기리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동물이지만 어미에 대한 효를 통해 인간에게 효성을 일깨워주었다. 마을에서는 마을 숲에 말의 사당을 지어주고 마을 이름도 마당리(馬堂里, 또는 마당골)라 불렀다. 말 사당인 마당馬堂이 있는 숲을 뜻하여 당림리堂(塘)林里가 되었다고 마을 어르신들은 말한다.
또한 마당리에는 1895년 을미년 춘천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마을 어른 이덕일이 친일 관찰사 조인승을 체포해서 석파령 너머 춘천 관아로 압송하여 처단토록 하였던 역사가 있으며, 춘천을미의병이 친일 관료를 몰아내려 서울로 진공 작전을 펼칠 때 머물며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가다듬던 공간이기도 하였다.
구불구불 험준한 석파령
석파령은 다양한 한자로 표기되어 왔다. ‘石坡嶺’ ‘石波嶺’ ‘石破嶺’ ‘石岥嶺’ ‘席破嶺’ 등의 한자 표현이 보이는데, 석 자는 돌 석石 자와 자리를 펼칠 석席 자 두 글자이고 파 자는 波 破 坡 岥 등 네 글자가 보인다.
신구新舊 고을 원님의 임무 교대식이 고개 정상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고개 정상이 아주 협소하여 자리(席)를 둘로 쪼개어서(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석파령席破嶺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고을 원님의 임무 교대식이 왜 고개 정상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반면 석파령의 두 번째 글자인 파 자에는 주름진 동물 가죽을 뜻하는 ‘皮피’ 자가 모두 들어 있다. 이는 고개가 가죽 주름처럼 몹시 구불구불하여 험하다는 뜻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에 석石은 셋을 뜻하는 삼악산三岳山의 삼三의 훈訓(뜻)인 ‘석 삼’의 ‘석’을 음차한 것은 아닐까? 즉 석파령이란 몹시 구불구불하며 힘한 삼악산에 있는 고개란 뜻이 된다.
또한 석파령의 대대적인 정비사업과 관련 지어 설명할 수 있다. 석파령은 돌과 바위가 많을 뿐 아니라 좁아서 매우 넘기 힘들고 험한 고개였다. 이 때문에 1558년 우두사의 중 지희智熙가 돌과 바위를 깨고 펴서 고개를 수선하였고, 1647년 춘천부사 엄황이 거듭 평탄 작업을 하고 비를 세워 기념했다고 문헌에 전해진다. 돌과 바위를 깨뜨리고 펴서 이루어진 고개라는 뜻이 반영되어 ‘席破嶺’ ‘石破嶺’으로 표기된 것으로 이해된다.
당림리 당숲마을 이정표와 덕두원 봄내길3코스 석파령너미길 팻말
당림리와 덕두원 두 마을을 이어준 석파령
당림리에서 석파령을 넘으면 덕두원이다. 덕두원에는 당림리에서 시집 온 할머니가 살았는데, 지난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올봄에 대전으로 이사 가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당림리 민 씨 할머니로 60년 전에 덕두원으로 시집을 갔고, 당림초등학교 앞 가게 할머니의 사촌 동생이라고 한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혼인이 자주는 아니지만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두 마을에서는 한 해 농사가 끝나 갈 즈음에 두 마을 남정네들은 날짜를 정하여 석파령 정상에서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차로 통행할 수 있는 큰길이나 터널이 뚫리기 이전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주요한 통로는 고개였다. 고려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천 년 넘게 사연을 지니고 석파령을 사이에 두고 당림리와 덕두원을 오갔다. 석파령이 당림리와 덕두원 두 마을을 이어주던 모습은 멈추었지만, 봄내길 3코스인 ‘석파령너미길’이 만들어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10월 어느날 가을의 한복판에서 당림리와 덕두원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며 석파령 옛길에서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만산홍엽의 계절을 만끽하면 어떻겠는가!
글 허준구
문학박사. 춘천학연구소 소장. 일찍이 춘천학에 관심을 갖고 춘천의 역사와 문화에 집중해 왔다.
특히 천혜의 춘천 자연환경에 문화와 역사의 색을 입히는 데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