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황금들판> 종이 위에 색연필, 수채화물감. 정상명
가을이면 어쩌다 입속에 달라붙은 유행가가 진종일 달라
붙듯이 나도 몰래 군침처럼 맴도는 말이 하나 있으니,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다. 고등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그 말을 처음 만났다. 지금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지 모르지만, 안톤 쉬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우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庭園의 한 모퉁이에 놓여있는 작은 새의 주검 위에 초추의 양광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처음 그 말을 만났을 때에는 한자를 배우다 말다 거듭해 서였던지라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초추의 양광이 뭘까? 초나라에서 온 등불일까? 아리송하기만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초가을의 따뜻한 햇살’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후 가을만 오면 그 단어가 떠올랐다.
사물과 심경心境의 뛰어난 관찰자, 안톤 쉬낙의 그 산문은 또 얼마나 명문이었던가. 지금도 ‘우는 아이’를 만나면 그 산문이 떠오를 정도이니까, 문학의 힘은 생각보다 깊고 강하다. 동기 간 폭력은 물론이고 교사 폭력도 일상화되어 있던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고교 시절이었지만, 교과서를 통해 마른 벌판의 샘물 같은 그런 멋진 ‘문학’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복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산에 단풍놀이 가는 ‘가을’도 있지만, 안톤 쉬낙의 산문에 담긴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에 주목하려고 한다.
가을은 슬프다. 이유가 없다. 그냥 슬프고 애잔하다. 모든 게 덧없이 느껴지면서도 아름답다. 가을 공기의 정령精靈 속에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기운이 들어 있나 보다. 오죽하면 ‘가을을 탄다’는 말도 있을까. 왜 가을은 사람을 고즈넉하게 만들고, 처연하게 만들고,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살던 내면을 응시하게 할까. 아마도 모든 것이 고개를 숙이고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여름의 그 혹독한 폭염과 햇살에 온몸을 녹색으로 무장하고 생명의 힘을 내뿜던 나무들도 잎을 떨구기 시작하고, 못 말리던 풀들의 기세도 꺾인다. 이름을 아는 꽃들, 이름을 모르는 꽃들도 거의 다 사라지고, 허락도 없이 다른 나무를 감아 옥죄던 넝쿨조차도 더럽혀진 휴지처럼 오그라든다. ‘가을 들판’ 자체가 곧 가을의 완전한 은유일진대, 익은 벼를 매달고 있는 황금들판은 가을의 아름다움 중에 으뜸가는 장관이다.
가을은 눈부신 최종 결산의 계절, 모든 일이 완수된 절정의 계절이다. 그런데도, 가을이 오면 ‘대체로 슬픈 것’은 왜일까?
최근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득한 옛날, 나무는 본래 풀과 같이 키가 작은 난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난쟁이 상태가 싫어진 나무는 더 자라고 싶어서 오랜 세월 몸속에서 ‘리그닌Lignin’이라는 분자를 개발했다. 그 후 나무는 오늘날처럼 뿌리는 중력에 순종해서 땅속 깊이, 몸뚱어리는 중력을 거슬러 하늘 높이 뻗을 수 있게 되었다. ‘풀’에서 벗어나 원껏 자란 나무는 하늘이 얼마나 경탄스러웠을까.
이것은 자그마치 3억 5천만 년 전의 이야기다. ‘찬란한 우리 역사’가 겨우 반만년이니까 3억 5천만 년 전은 인간의 상상력 너머의 시간이다. 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가 중력에 저항하는 전사들처럼 마음껏 자라다가 수명이 다 되자 쓰러졌다. 그런데 문제는 쓰러진 나무를 분해시킬 균류나 곰팡이가 당시 ‘자연상
태’에서는 마련이 되지 않았다. 나무의 진화가 세상의 진화를 너무 앞질러 간 것이었다. 쓰러져 죽은 나무들로 이 행성은 거대한 나무의 무덤이 되었다. 썩지 못한 목체木體는 땅속으로 가라앉았고, 수백 만 년 동안 ‘땅속의 숲’은 열과 암력으로 암석이 되었다. 페름기 말 시베리아 화산구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수십만 년 동안 용암을 분출했다. 마그마와 닿은 나무암석은 꺼질 줄 모르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대기는 온난화되었고 바닷속 얼음 속의 메탄마저 방출되어 바다는 산소 부족으로 고요한 호수가 되었고, 지구는 몇 억년 동안 죽음의 행성이 되었다. 곧 페름기 말 대멸종이다.(내셔널지오그래픽, <코스모스-잃어버린 세계>에서). 그런즉, ‘모든 대멸종의 어머니’라 불리는 페름기 멸종은 나무의 욕망이 부채질한 셈이다.
지금 예상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는 인류세의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인간의 행위로 인한 멸종의 행로다. 인류세는 ‘지구에 인간이 가한 충격’을 의미하기 위해 고안된 지질시대 용어다. 나무는 더 자라고 싶다는 리그닌만 개발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을 모른다. 이전까지의 멸종은 모두 자연이 일으킨 일들이나 이번에는 우리 인간이 초래한 재난이다. 기후재앙을 전하는 뉴스들은 한결같이 ‘기후변화-최악의 흉조-온실가스 농도/해수면 관측 이래 최고’라는 말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대멸종이 갑작스럽게 단기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 건너 불로 여기고 있으며, 그런 일은 내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방법이 없어서일 것이다. 개인의 작은 실천이야 숭고한 일이지만 국가가 존속하는 한, ‘동시대적 견해’의 일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류세에 맞이한 또 한 번의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산들바람 산들 분다』,『나무가 있던 하늘』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