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세콰이아 숲길에 매미가 운다. 세 사람의 여성이 카페 ‘숲’으로 들어선다.
메타세콰이아 나무들 사이로 초록빛 바람이 흐른다.
꽃을 그리는 화가, 정물을 그리는 화가, 생명의 씨앗을 그리는 화가.
이 세 사람에게 나는 별칭을 붙이기로 한다.
꽃을 그리는 화가에겐 한아름 꽃을,
정물과 풍경을 그리는 화가에겐 고요 속의 고요를,
내면의 씨앗을 그리는 화가에겐 생명의 씨앗이란 이름을.
그래. 이름을 연결해보자.
‘한아름 고요, 그 속에 눈 뜨는 생명의 씨앗’
동내면 느티나무 마을
세 화가의 산책
이 세 사람은 방금 미술관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다. 강원화단 60년 초대작가전에 박순배 화가의 그림 두 점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화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룡산 풍경’과 ‘정물화’를 내놓았다.
대룡산 사암리 마을에 사는 화가 박순배 님은 수채화 빛깔로 엷게 물들어 있다. 세 화가 중 맏언니 격인 박순배 화가는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수줍은 소녀 같다.
자신을 늘 성찰하는 최찬희 화가. 그는 원창고개를 넘어서 왔다. 동산면 구암리 계곡물을 건너면 언덕배기에 구암갤러리가 있는데, 그곳이 최찬희 화가의 살림집이자 작업실이 있는 곳이다.
유화만 고집하여 꽃을 그리는 화가 박복균 님. 그의 집은 주황색 천인국으로 가득하다. 그 안에 바람이 숨어 있다. 바람에도 색채가 배어 있음을 화가는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박복균 화가는 그냥 바람을 만나러 문밖을 자주 나선다.
박순배 화실
볼만한 전시회가 있으면 세 화가는 서로 연락하여 함께 가거나, 생필품이 필요할 때면 학곡리 하나로마트에서 만나기도 한다.
최찬희 님은 원창고개를 넘어와 두 화가의 집을 방문한다. 이들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주로 그림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나누기도 한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세 화가 모두 교사로 봉직했다.
박순배 님과 최찬희 님은 중등교사로, 박복균 님은 초등교사로.
남편들도 모두 교육자로 봉직했다.
남편들은 이제 자신들이 지은 집의 정원사 일을 도맡고 있다. 나무를 다듬거나 여러 가지 채소를 길러 식탁에 올린다. 씨앗을 뿌려 꽃들을 가꾸는 일은 부부가 함께한다.
사암리 길은 오솔길과 마을의 골목길, 조금 넓은 자동차 길이 나 있다. 그 골목이나 오솔길에서 우린 반가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오래된 느티나무 골목길을 지나면 마임이스트 유진규의 집을 발견한다.
최찬희의 구암갤러리
최찬희의 구암갤러리 전시장
춘천 조각의 선구자인 백윤기, 베스트셀러 연필화가 이희용, 항상 새로운 판화의 세계를 여는 판화가 김영훈의 작업실이 있는 곳이 바로 대룡산 자락이다.
또한 독특한 캐릭터로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완숙 조각가의 작업실도 사암리에 있다.
옛날엔 동시인 유성윤이 논 한가운데서 살았다. 나는 딱 한 번 사암리 논둑길을 따라 유성윤 시인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는 논밭이 질펀했다. 아마 정미소가 있는 마을이었 을 것이다. 그 동시인의 집에서 나는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에 집을 나와 논길을 걸을 때 저벅저벅 된서리가 발에 밟혔다.
11월 초 새벽바람이 매서웠다. 그리고 50년 후, 나는 새로운 집들이 들어찬 오솔길과 개울과 도랑을 건너 박순배, 박복균, 최찬희의 집을 찾아갔다.
최찬희 화가의 집은 구암갤러리.
언덕 위에 대여섯 채의 집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 그의 집이다.
전망이 탁 트인 집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 깊은 곳에 갤러리가 있다니.
이완숙 조각전이 이곳에서 열렸을 때 나는 초대를 받고 간 적이 있다. 아늑하고 멋진 공간은 품격이 돋보이는 갤러리임을 알 수 있었다.
최찬희 화가의 작업실은 갤러리 위층인 다락방이었다. 동화 속에나 나올, 그림 그리는 이슬요정이 바로 최찬희 화가였다. 그는 이곳에서 마음의 씨앗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화가의 말처럼 ‘상큼한 아침공기와 이슬 맺힌 풀꽃들, 새소리 물소리에 한없이 귀 기울이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 미술협회는 그에게 제5회 춘천 미술상 창작상을 수여했다.
박복균 화가의 집은 이완숙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의 정원엔 온갖 꽃이 만발해 있다.
2019년 5월 봄날, 나는 카페 ‘느린 시간’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엔 박복균 화가의 유화가 걸려 있었다. 개인전 타이틀도 ‘오월에 마음을 놓다’ 였다.
박복균 정원의 천인국
나는 오래오래 꽃그림을 바라보았다. 독특한 화법이었다. 색깔과 색깔이 혼합된 그림이나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밝고 싱싱해 보였다.
마치 미국 여성화가 캐리 슈미트의 그림이 연상되었다. 아픈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그림을 시작한 캐리 슈미트. 우린 그의 그림에서 마음의 치유를 얻었듯이 박복균 화가의 그림도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박복균 화가는 ‘숨어 있는 화가’이다. 하지만 그의 화력은 만만치가 않다. 강원교원미전 은상을 시작으로 동아미술대전 동상 등 많은 수상 경력이 있다. 그의 그림은 아픔을 지닌 사람에게 마음의 치유가 되는 마법이 있다.
박순배 화가의 집은 잔디 마당과 본채와 별채, 그리고 남편께서 소일하는 채마밭이 뒤란에 있다.
수채화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박순배 화가는 정확한 데생 능력과 깊은 색채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시인 헤르만 헤세가 그린 수채화를 보면 마음에 평안을 느낀다. 그처럼 박순배 화가의 그림도 간결하고 난삽하지 않은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과 목우공모미술대전 르·살롱상 최우수상이 증명하듯 박순배 화가는 한국 수채화의 대들보요, 거목임을 알 수 있다.
현재도 강원대 평생교육원에 출강하여 미술 강의를 하고 있다. 세계수채화 트리엔날레 전시기획 분과위원장을 맡기도 한 그는 아직도 에너지 넘치는 현역이다.
그래서 박순배 화가의 수채화는 후학들의 훌륭한 교본 이 되고 있다.
그림으로 시를 쓰는 시인 박순배 님
자연의 씨앗을 가슴에 품고
온갖 소리를 화폭에 담는 요정 최찬희 님
꽃에서 색의 미풍이 느껴지는
마음의 치유사 박복균 님
박복균 작품 ‘여름노래’
박순배 작품 ‘아름다운 곳’
최찬희 작품 ‘가을과 봄 사이’
이 세 사람의 화가가 카페 ‘숲’에서 만나 산책을 하고 있다. 입추가 지났다. 가을이 옴을 시샘하는지 장마비가 내렸다. 잠깐 사이 날이 맑은 날, 세 사람은 메타세콰이아 나무와 희디흰 뼈의 자작나무 숲과 오래된 소나무 사이를 걷는다.
이 세 사람은 이 숲으로 와 느리게 걷기를 즐겨 한다.
박순배, 최찬희, 박복균 세 사람은 숲의 아름다운 골목을 거닐 때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래. 이제 또 시작하는 거야.
내겐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늘 새롭지. *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 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 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