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서 작업이 안 되면 비오는 날 뛴다는 이익훈 씨
세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건 서민들에게 당연한 생활의 방편이었다. ‘투잡’, ‘쓰리잡’이 익숙한 요즘, 둘 이상의 일을 하며 삶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낮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살다가 해가 지면 기타를 둘러매고 공연장이나 녹음실로 가는 사람, 낮에는 치과에 나가 치기공사로 사람들의 입속을 들여다보다가 저녁이면 친구가 운영하는 네일아트 가게로 출근해 사람들의 손톱을 매만지는 사람, 누구나 불도저를 운전하는 중장비기사로 알고 있지만 낡은 옛 책을 감쪽같이 새 책으로 둔갑시키는 헌책 수리가의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 같은.
1998년 단편 「오믈렛」으로 제4회 김유정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소설가 이익훈 씨(49). 아직 주연은 맡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어떤 배우냐고 연출가에게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신 스틸러죠”라는 얘기를 듣는 연극배우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가로도 배우로도 ‘유명’과는 거리가 먼 그에게는 생활의 거의 전부를 책임지게 해주는 입시학원 수학 선생님이란 직업이 하나 더 있다. 그가 가진 이 세 가지 직업의 특성들을 하나로 꿰는 게 쉽지 않은데, 우선 전공도 아닌 수학을 가르친다는 게 가장 이색적이다. “수학 과목이 그냥 좋았어요. 별 노력을 안 했는데 성적도 좋았고요. 대학 다닐 때도 수학 과외를 했어요.”
오래된 신인 소설가, 늦깎이 배우
이익훈 씨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지만 거의 최근까지도 그는 소설가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신인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등단작 외에 다른 작품을 아직 보여주지 못한 작가. 게으른 작가인가, 했었다. 등단할 때가 스물여섯 살이어서 열정이 넘쳤을 텐데. 사정이 있었다. 몇 년 동안은 열심히 썼다. 쓰는 게 재미있었다. 원고청탁이 오지 않아서 열심히 투고도 했다. 하지만 문단의 벽은 높고 두꺼웠다. 어느 순간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시들해졌다. 등단작만 세상에 내놓은 채 물러나는 건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신인이 겪는 일종의 현상인데, 그도 피하지 못했다. 올가을 김유정문학촌에서 새롭게 펴낼 예정인 『제1선』 복간호에 그의 단편이 실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신인의 기분으로 오래 묵힌 작가 정신을 날카롭게 벼렸으면 싶다.
무대에 선 이익훈 씨를 본 것은 코로나로 공연장이 온통 멈추었던 2020년 겨울이었다. 극단 ‘무소의 뿔’이 열 명 남짓한 관객들을 특별 초청해 공개한 <더 달>(연출 정은경)에서였다. 대사 없이 큰 몸집으로 무대를 이리저리 방황하는 그를 그때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듬해 같은 극단 같은 연출가의 <보이체크>에서 예의 독특한 캐릭터를 덤덤히 소화해 내는 그를 봤을 때 비로소 소설가 이익훈과 연결고리가 끼워졌다. 셰익스피어 명작 <오델로>의 이아고, 체호프 <바냐 아저씨>의 아스트로프,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의 뢰르 같은, “아주 갈팡질팡하는 철학자, 고집스러운 달변가, 속을 알 수 없는 관망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 그러고 보 면 ‘관망’이란 단어만큼 그를 잘 설명하는 단어도 없을 듯 싶다. 일인극 대본을 직접 써서 배우까지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쓸 거냐는 물음에 “이랬다가 저랬다가 말을 번복하고 반복하고, 정서적으로 너무나 가볍고 저속해 보이지만 애잔한 너무나 쓸쓸하고 쓸쓸한 이야기를 쓸 것 같다”고 답한 걸 보면 더욱이나.
소설가 배우, 배우 소설가를 위하여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말수 적고 속엣 표현도 잘 못 하는 천하의 순둥이인데, 말장난을 심하게 즐기는 어느 한구석은 참 실없이 재밌다. 가령, “소설과 연극 중 하나를 택하라면?”이라는 물음에 “저는 ‘과’를 선택하겠습니다”라는 대답 같은. “뭐 이런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도 있지만, 이익훈만의 독특함이라 해도 틀리진 않다. 살면서 양보를 많이 했다는 그는 크게 욕심을 내면서 살고 싶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에게 욕심은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실수를 눈감아주고, 완벽하지 않아도(완벽한 적도 없지만) 괜찮다고 쓰다듬어 주는, 수다스럽지 않은데도 조용해지고 싶다고 바라는 참 희한한 욕심이다.
지금까지 방법을 잘 몰라서 누군가에게 투덜대거나 가짜로 강한 척하거나 지나치게 반성했던 것 같다고 털어놓는 그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면 다를 것 같단다. “우선, 땀을 많이 흘리고, 열심히 청소하고, 나물과 향기로운 들기름을 넣은 비빔밥을 해먹고, 잘 울고, 견딘다 티 내지 않고 견딜 것 같아요”라는 그의 말에 는 괜히 울컥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다. 자신은 그 연극의 주인공이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대답은 이랬다. “아, 이제 부터 생각해봐야겠어요.” 대책 없이 솔직하다. 잘 꾸며내는 게 소설가고, 자신 아닌 사람을 살아내야 하는 게 배우인데, 하다가 가만히 웃었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 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