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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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79

2022.08
#봄내를 품다
최성각의 녹색이야기 ⑧
해수욕 가던 길

<추억은 한 덩이 흰 구름처럼> 종이 위에 색연필, 색종이. 정상명  



올여름도 엄청 덥다. 지난 겨울 추웠던 어느 날,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구나”라고 중얼거렸던게 후회된다. 여름이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겨울도 서늘한 게 괜찮아. 빨리 여름이 갔으면 좋겠네” 라고 중얼거린다. 계절마다 이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한번쯤 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되풀이되던 일이다. 

나이 들어 산촌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내 사는 곳에는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래서 여름 한철이면 피서 온 사람들로 붐빈다. 계곡에 놀러 온 이들과 부대끼면서 문득, 동해안에서 태어난 내 어린 시절 해수욕 가던 생각이 난다.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바다로 피서 갔다. 아버지는 커다란 짐자전거에 솥을 실으셨다. 솥 위에는 커다란 군용 천막을 여러 겹 접어서 실으셨던 것 같다. 전쟁 직후인지라 숟가락, 찬합, 수통 등 일상용품들 중에는 군용품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함지 가득 먹을 것을 담았다. 쌀, 쌈채소, 고추장, 된장, 옥수수, 감자, 수박 따위들이 거기 담겼을 것이다.

바다는 시에서 동쪽으로 10리길 너머에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 옆에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우리 가족은 차라도 지나갈라치면 흙먼지가 일고 자갈이 튀는 신작로보다는 남대천 옆의 천방둑을 따라 바다로 갔다. 아버지가 끄시는 짐자전거가 앞서고, 이어서 형들이 뒤따랐는데, 형들도 모두 한 짐씩 맡았다. 아마도 장작이나 차양을 칠 말뚝 같은 것을 짊어졌을 것이다. 어린 나는 뭘 들었을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빈손이었을 리는 없다.  

우리는 대가족이었다. 형제만 일곱이었는데다 피난살이도 같이 했다는 어려운 이들과 동거했으니 그들까지 합치면 1개 분대가 넘는 인원이 해수욕을 갔다. 잘 걷지 못하는 어린 동생들은 누군가 업었거나 목덜미에 올렸을 것이다. 

바다로 가는 방둑길 10리는 신명 나는 길이었으나 바다는 너무 멀고, 새벽같이 출발했으나 이글거리는 여름 햇살은 뜨거웠다. 하지만, 곧 바다가 나타난다는 설렘으로 모두 들 폭염을 꾹 참았다.  


강의 하구에 이르면 과수원과 거대한 미루나무숲이 나타났다. 숲에서 터져나오는 매미 소리가 귀를 찔렀다. 때때로 시원한 산들바람도 귓전을 스쳤다. 바람 속에 끈적끈적한 짠내가 느껴지는 걸 보아 바다가 멀지 않았다. 숲이 끝나면 해송이 나타났다. 일찍이 조선시대에 방풍림으로 심었다는 해송은 바다로부터 날아오는 짠 기운도 걸러주고, 혹 밀려 올지도 모를 해일도 막아주는 소중한 숲이었다. 

우리 가족 앞으로 몇몇 가족이 부지런히 걷고 있었고, 우리 뒤에도 몇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뒤따랐다. 모두 바다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시 1960년대, 시市에 살던 이들은 모두 걸어서 바다 로 갔었다. 

여름 강은 천천히 흘렀고, 천방둑에서는 풀냄새가 진동했다.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가족들 무리에서는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다에 이르면, 먼저 도착한 이웃들이 천막을 치고, 솥을 걸고, 늦게 도착한 이들을 손을 흔들어 맞이했다. 바다는 지난해처럼 푸르고 크고 넓고 기운찼다. 그 압도적인 위용과 아름다움은 표현할 재간이 없다. 모래사장 끝 솔밭 아래로는 군데군데 붉은 꽃이 피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춘 해당화였다. 눈이 부시고 발바닥이 너무나 뜨거웠던 하얀 백사장, 거기 핀 붉은 꽃, 그리고 거기 펼쳐진 솔밭은 현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짐을 풀어놓기 바쁘게 바다에 뛰어들었다.

형들은 ‘빤스’ 바람으로 바다로 뛰어들었고, 어린 우리들은 알몸뚱이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있는 날도 좋았고, 파도가 없으면 더 좋았다. 어려서부터 바다를 보고 자란 우리는 엔간한 파도에는 겁을 먹지 않았다.

아버지는 형들과 같이 백사장 한쪽에 터를 잡고 말뚝을 박고, 차양을 치기 시작했다. 차양을 다 치면 아버지는 솥을 걸고, 불을 지폈다. 함지를 내린 어머니는 경쾌한 도마 소리를 내면서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무슨 재료로 국을 끓였는지는 모른다. 공장식 축산으로 얻은 고기를 지금같이 쉽게 먹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어머니가 국에 넣은 재료 들을 어린 나는 잘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고 깨끗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육고기가 들어갔다고 해도 집에서 기른 동물들이었을 것이다. 됫병으로 소주를 마시던 당시 어른들은 해변의 식사를 마친 뒤,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천천히 헤엄을 쳐서 먼 바다로 나가셨다. 참으로 의젓하고 멋진 어른들이었다. 

해수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짐이 줄어들어 가벼웠지만 온 몸은 바닷물과 햇살로 익어서 따갑고 뜨거웠다. 그 날 밤에는 바다와 햇볕에 덴 화상火傷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며칠 후에는 살갗이 벗겨졌다. 여름에만 맛보는 특별한 통증이었다. 


그렇게 걸어서 해수욕 가던 시절은 갔다. 바다는 깨끗했고, 바다로 들어가는 강물도 깨끗했다. 하늘도 오염되지 않았다. 모두 고르게 가난하던 시절, 만나면 많이 웃던 그 시절, 그토록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산들바람 산들 분 다』,『나무가 있던 하늘』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