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의 변신’
유월 들어 춘천에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안개처럼 나타났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인형의 도시는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피노키오를 수소문 했다. 떠들썩하게 피노키오를 찾다 보면, 겁 많은 피노키오가 어디론가 깊은 곳으로 꼭꼭 숨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봉의산 코코바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코코바우는 피노키오와 닮은 형제가 아닌가.
춘천은 인형의 도시이다. 이 도시의 마스코트는 코코바우. 피노키오를 모델로 코코바우를 만든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어제 내린 비로 도로는 말끔해졌다.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거리 양쪽으로 숨죽인 자동차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살수차, 승용차, 버스, 트럭 등등. 모두 폐차의 절차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다.
이 공단엔 폐차장이 네 군데인데, 운영되고 있는 폐차장은 두 군데이다. 안쪽으로 폐차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거나 너른 마당을 꽉꽉 채우고 있다. 자연스레 폐차의 골목이 만들어졌다. 저 골목 어디쯤 피노키오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코코바우와 피노키오
내 마음의 코코바우가 잠시 그 골목을 배회한다. 형제인 피노키오를 찾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코코바우가 돌아와 머리를 젓는다. 없다는 뜻이다.
후평 일반산업단지 전경 사진 유현식
아무리 폐차라도 자동차마다 3만여 개의 부속품들이 있다. 분해하여 골라낸 부속품은 진열대로 옮겨진다. 내장이 모두 적출된 자동차는 껍데기만 남는다. 그것들은 압착기에 넣어져 납작하게 압축될 예정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피노키오가 저 폐차 속에 숨어 있어도 그런 횡액을 당할 염려는 없다. 상어뱃속에서도 탈출한 피노키오가 아닌가.
새파란 하늘에 빙설 같은 구름들이 둥둥 떠 있다. 이 구름군단은 유난히도 하얘서 하늘이 더욱더 짙푸르러 보인다.
피노키오.
구름 속에 숨었니?
(좌)‘폐차장 풍경’ 그림 이형재 (우)피노키오를 꼬드기는 고양이와 여우
1973년 소양강댐이 완공되었다.
당시엔 동양 최대의 사력댐이라 했다. 댐으로 물의 흐름이 막힌 3개 시군이 물에 잠겼다.
수몰민 2만3천명이 발생했다.
어디로 갈까. 고향을 떠나면 무얼 하며 먹고사나, 그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들의 바람은 안정된 취직자리였다.
그래서 뒷드르(후평) 벌판에다 경공업단지를 조성했다. 14개의 공장이 들어섰다. 금속공업, 식품, 섬유가 주축을 이루었다.
취직을 바라던 수몰민들은 경공업단지로 몰려들었다. 공장마다 황금나무가 자랐고, 직장인이 된 수몰민은 물에 잠긴 고향을 잊고 나무에 열리는 금화를 땄다.
카를로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엔 바보나라의 벌판이 나온다.
고양이와 여우의 꼬드김으로 금화를 벌판에 심은 피노 키오는 바보나라의 벌판에서 자랄 황금나무를 상상한다.
그러나 고양이와 여우에게 속았다는걸 안 피노키오는 바보나라의 벌판에 심은 금화를 찾으러 갔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고양이와 여우는 금화 한 개를 캐내지 못한 걸 자 신들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보나라의 벌판은 꼭 <하나> 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마법이 존재하니까.
나는 이런 상상에 젖어 네모난 길을 걷는다.
그래. 피노키오가 여기 온 건 그 씨앗금화 때문일 거야. 그 씨앗금화는 쇠락한 현재의 공단을 다시 일으키겠지.
공장의 문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다.
드넓은 공장의 울타리, 마당은 잡초로 우거지고, 건물 유리창은 모두 깨어졌다.
당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이곳으로 몰려왔던 수몰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무거운 걸음으로 목재소를 지나고, 섬유공장을 지나고, 폐허가 된 담배회사 건물을 지났다. 춘천기계공고의 길가 나무 그늘을 지났을때 나는 황금나무를 보았다.
아니다. 나는 황금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황금나무커피’의 검은 글자를 보았다.
이곳이 정말 원두커피를 볶는 가공공장일까.
흰 페인트칠의 시멘트 단층 건물은 금이 가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희미한 형광등이 비치는 저 안쪽. 황금나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건물 담을 끼고 돌자, 내 눈에 눈부신 건물 한 채가 들어왔다.
그리고 내 마음의 코코바우는 형제 피노키오를 기어이 발견해 냈다.
강원디자인진흥원 특별기획전 ‘My Dear 피노키오’.
코가 긴 피노키오는 귀가 토끼 귀였다. 그 피노키오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거짓말을 곰곰이 궁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진짜 나를 만나려면 안으로 들어가 봐. 피노키오는 내게 거만하게 말했다.
보라색 상상의 회로를 통해 나는, 아니 마음속 코코바우는 이상한 여행을 시작했다. 이 가상의 모험에서 피노키오는 다양하게 디자인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앤서니 브라운, 제럴드 맥더멋, 로베르토 인노첸티, 마누엘라 아드레아니가 그린 피노키오는 저마다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여 내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피노키오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삽화, 오래된 책들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이야기에서 나는 황금나무를 거짓말처럼 꿈꾸었고, 그에 따라 내 코가 쑥쑥 자라나는 환상에 잠겨 들었다.
폐쇄된 공장의 무성한 잡초와 정적의 골목
강원디자인센터 전경
강원디자인센터의 하늘창
강원디자인센터 복도와 길영우 연주자
어디선가 꿈결같이, 재즈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 층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애절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소리에 이끌려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카페 <뜰>이었다.
디자인센터 건물 안쪽엔 뜰에 <뜰>이 있었다.
길영우 연주자는 영혼처럼 색소폰을 불었다. 그는 2005년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학원에서 3년 동안 알토색소폰을 공부한 연주자였다.
그는 강원디자인센터 안에 있는 카페 <뜰>의 매니저이다.
원두커피를 볶아 손님에게 커피를 놓아드린 후, 종종 색소폰을 불었다. 그러면 뜰의 자작나무가 푸릇푸릇 생기를 띠고 조금씩 자랐다. 네모난 하늘창으론 흰 구름이 몰려와 귀를 기울였다.
아늑하고 아름다이 디자인된 뜰에 강원디자인진흥원 최인숙 원장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도 조용히 색소폰 소리를 들었다. 길영우 님의 색소폰 소리를 들으면 저마다의 영혼에 피노키오의 황금나무가 자라곤 했다.
이 진흥원 건물은 5년 동안 공들여 지었다. 구석구석 어느것 하나 최 원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했다.
자작나무 세 그루도 원장의 정성으로 싱싱하게 자랐다. 한 사람의 힘이 바탕이 되어 전체가 조화롭게 디자인된 이 건물은 후평공단의 새로운 상징으로 우뚝 섰다.
그래.
저 자작나무가 바로 황금나무야.
아름다운 꿈이지.
이 낡고 어두운 후평공단이 곧 황금나무로 활기를 되찾게 될 거야.
피노키오.
이제 넌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우리 마음속에 자라나는 진실의 나무이지.
길영우 님, 색소폰을 부세요. 어서요! 아주 신나게요! 하늘창으로 날아가 구름 타고 멀리멀리. *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 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 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