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인 우리나라는 고개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지금이야 터널이 뚫리고 편해진 세상이지만 고향이 지척인데도 만 리처럼 느껴져 넘지 못하는 며느리 고개였고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는 이별 고개였다. 민족 수난 시대 애환을 지닌 아리랑 고개까지 고개는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민족혼과 정서의 한 부분이었다. 인생의 오르막에 숨이 깔딱 찰 정도에 오르고서야 내리 막길을 보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넘어섬은 우리네 인생의 질곡을 뒤로하고서 언덕 너머에 있을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자로 만나는 고개의 의미
고개를 나타내는 한자로는 령嶺 현峴 치峙 재岾가 있다. 네 한자에는 모두 산山 자가 들어가 있으며 고개의 규모와 역할에 따라 조금씩 달리 사용했다. 령嶺은 가장 규모가 큰 고개로 도道나 시군市郡의 경계 또는 규모가 큰 고개에 붙여 사용하였다. 재岾는 마을 어귀에 성황이나 솟대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는 고개에 붙여 사용하였다. 현峴과 치峙의 구분은 뚜렷하지 않으나 면面 단위 정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에 붙여 사용하였으며, 현峴이 령嶺보다 규모가 작지만 치峙보다 규모가 크며, 치峙보다 경사도가 완만하며 비교적 덜 가파른 형태를 띤다.
사통팔달 춘천의 고개
춘천 또한 높다란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 분지다. 이러 한 까닭에 춘천에서 다른 곳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려면 고개 를 넘어야 했다. 터널이 뚫리고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 서울 로 가려면 서면 삼악산 뒤편 덕두원에서 안보리로 이어지는 석파령席破嶺을 넘어야 했고, 홍천으로 가려면 동내면 대룡 산과 금병산 사이 원창고개原昌峴를 넘어가거나 동내면 고은 리에서 대룡산을 넘어 홍천 북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해야 했다. 양구로 가는 길은 소양강 줄기를 따라가면 되었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화천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경로가 있으 니, 신북읍 발산리에서 양통령兩通嶺을 넘어 양통으로 들어 가 부다리고개를 넘어가거나, 지내리에서 새밑고개를 넘어 고성리로 들어가 부다리고개富橋峴를 넘어가야 했다.
더위를 피해 구봉산을 찾은 시민들(1996.6.)
카페와 맛집이 들어선 구봉산(2022.6.)
잊히는 갑둔이고개와 떠오르는 구봉산
1991년 8월 강원도 고성에서 세계잼버리대회가 열리면서 춘천 외곽도로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명 ‘잼버리 도로’로 불리는 도로가 신동면과 동내면, 동면 외곽으로 뚫리면서 특히 동면 구봉산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 도로는 신동면 팔미교차로-정족리·학곡사거리·거두리-만천 사거리-구봉산·감정삼거리·느랏재·평촌리·상걸리·홍천 풍천리-가락재·구성포로 이어진다. ‘잼버리도로’ 개설전에는 춘천 동내면에서 홍천 구성포로 가려면 갑둔이고개(갑둔치甲屯峙, 516m)를 넘어야 했다. 갑둔이고개는 대룡산大龍山(899m)과 구봉산 가운데 최고봉인 명봉明峰(643m) 사이에 있으며 동내면 거두리와 동면 상걸리를 연결한다. 이에 반해 구봉산 후면에 있는 동면 감정리에서 상걸리로 가려면 느랏재를 넘어 물푸레마을(평촌리)을 지나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훨씬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마치 갑돌이와 갑순이가 살았을 것 같은 갑둔이고개는 춘천에서 홍천구성포로 나가는 관문인 셈이며 금강산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이러한 까닭에 춘천 선비는 갑둔이고개를 넘어 홍천의 외삼포·서석·행치령·양양·고성·간성-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기도 했다. 잼버리도로 개설로 동해로 나가는 출발점이었던 갑둔이 고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사라져갔고, 구봉 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변에는 춘천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섰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동내면 거두리와 동면 상걸리를 연결하는 갑둔이고개
구봉산 근처에는 춘천 박씨 시조 박항을 배향하는 구봉서원이 있었다. 춘천 박씨는 춘천을 관향으로 사용하는 유일 한 성씨로 조선 말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문암서원, 도포서원과 함께 문을 닫았지만, 현재 재실齋室이 구봉산 자락에 자리하여 구봉서원의 창건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춘천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개가 많다. 마을과 마을을 연계해주던 고개에는 제각각의 사연을 담고 있다, 갑 둔이고개는 상걸리에서 맞은편 거두리로 시집온 아낙이 넘었을 테고 춘천에서 동해로 떠난 선비도 넘었을 것이며 봇 짐 진 박물 장수도 오가며 넘던 우리네 삶의 애환과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이다. 갑둔이고개는 구봉산과 대룡산으로 오를 수 있는 갈림길 이기도 하다. 갑둔이를 사이에 두고 대룡산은 춘천을 감싸 주는 어머니 같고 구봉산은 춘천의 아름다움을 밤낮으로 함께하는 친구 같아서 이곳을 지날 때마다 즐거운 상상으로 늘 행복하다. 오늘도 일상의 고됨을 감싸 안고 인생의 고개를 희망으로 넘어서자.
글 허준구
문학박사. 춘천학연구소 소장. 일찍이 춘천학에 관심을 갖고 춘천의 역사와 문화에 집중해 왔다.
특히 천혜의 춘천 자연환경에 문화와 역사의 색을 입히는 데 힘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