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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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78

2022.07
#봄내를 품다
최성각의 녹색이야기 ⑦
‘노벨평화’에서 ‘생명평화’로

<거위의 산보> 종이 위에 색연필, 정상명 



얼마 전, 춘천에 사는 한 편집자와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선생님, 칼에 여기저기 찔린 고양이가 나와요. …무서워요!” 

통화 도중에 텔레비전에서 그런 끔찍한 내용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저런. 산 고양이를 왜? …사이코들!” “그러게 말이에요.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죄 없는 고양이를 저렇게 칼로 찔러놓을 수 있을까요.”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이름의 경찰관이 없고, ‘연민’이라는 이름의 화로火爐가 없는 사람들, 그렇게 잔인한 사람들은 인간 무리들 속에서는 대개 가장 약한 사람들이기 일쑤다. 통화를 마치고 생각해보니, 동물학대는 꼭 사이코패스 들만의 일일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동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문득 그런 질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간디가 한 말 중에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명언이 하나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간디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불릴 만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곧 “한 나라의 수준은 그들이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명언이 그것이다.  



인간의 동물학대는 그 끝이 어디까지일까   

나전후에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복날이면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보고 자랐다. 어른들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잡은 개를 개울가 풀밭 말뚝에 꿰뚫거나 매달아서 불로 그슬리던 광경도 떠오른다. 하늘로 흩어지는 검은 구름이 개의 영혼 같았다. 마을에 길흉사가 생기면 어른들이 중돼지 정도의 돼지 목에 식칼을 깊이 찔러넣어 바께쓰에 피를 뽑아내고, 큰 솥에 통째로 삶은 뒤 털을 뽑는 모습을 본 기억도 새삼스레 난다. 얼음이 언 개울에서 소의 정수리를 쇠망치로 쳐서 쓰러뜨리는 모습도 본 적 있다. 어려서 본 동물 살해 장면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인간이 자행하는 동물학대의 양태들은 차고 넘친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그 흑역사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정색하고 묻게 한다. 산 동물을 차에 끌고 달려서 죽이거나, 강아지를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동물 학대 뉴스도 잦다. 횟집에서는 살점이 발라졌지만 여전히 생선의 눈이 껌벅이면 신선하다고 환호한다. 산 것들을 가둬놓은 뒤 환호작약하면서 잡는 일이 축제로 둔갑한 이 나라 여러 산촌의 겨울축제….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황소의 성을 돋워 끝내는 창으로 찔러 죽이는 스페인의 투우나 돌고래를 만灣에 몰아넣은 뒤 작살로 찔러 죽여 피바다로 만드는 일본의 어부들, 덴마크의 고래 죽이기 축제, 소싸움, 닭싸움, 중국의 기이한 식문화 등등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잔혹함의 극치다. 동물의 눈으로 보면 인간종은 모두 사이코패스라고 간주할 것이다. 

물론 동물학대를 억제하려는 법률적 장치가 치밀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이 세상에 다녀가신 성인 들이나 현자들은 “다른 생명을 그렇게 대하지 말라”는 충고를 빠뜨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법 적용이나 성현들의 말씀으로 인간의 폭력성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노벨평화’가 아니라 ‘생명들의 평화’다   

2000년대 초반 새만금 갯벌을 살리려는 노력을 할 때, 나는 어떤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생명평화’라는 말을 사용 한 적이 있었다. 조계사 뜰이었는데, 환경단체 명망가들과 훗날 삼보일배를 감행한 실상사 스님들, 그리고 특이하게도 지금은 개발론자가 되었지만 당시 환경파수꾼으로 막뜨기 시작한 오세훈 변호사도 옆에 앉아 있었다. ‘생명평화’ 라는 말을 발화하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내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뜻의 말인가, 하는 얼굴들이었다. “20세기는 서로 죽이는 학살과 참화에 대응했던 ‘노벨평화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생명들의 평화’가 보장되는 공생의 시대를 만들어가자, 그런 뜻입니다.” 그러자 그중 문해력이 빠른 누군가가 “생명과 평화가 아니라, ‘생명들의 평화’라는 뜻이군요?”라고 확인했고, 나는 그의 빠른 이해에 탄복했다. 지금은 그 말을 여러 사람이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널리 사용하고 있지만, 내가 20여년 전, 임의로 사용했던 그 말의 첫 조합은 그런 의도였었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나도 있다    

이 행성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까닭은 그 안에 하늘, 땅, 물, 공기, 같이 살고 있는 동식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진리다. 달리 말하면, ‘지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 동학의 최시형은 이를 경물敬物과 양천養天이라고 했다. 경물이란 만물에 대한 외경이란 뜻이고, 양천은 그 외경의 마음을 하늘의 관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물이 인간의 조건인 이상, 만물을 하늘처럼 섬기고 길러야 한다는 ‘만물돌봄’의 철학이다. 이런 이야기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 쉽고 묵살당하기 쉽다. “너도 고기를 먹지 않느냐?”라는 질문 때문이다. 그렇지만 채식주의자들이 취하는 식물도 의식이 있는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육식문화는 문제가 많고 반드시 약화되어야 할 일이지만, 동물을 생명체로서 정중하게 대하자는 생각이 꼭 채식주의자들만의 주장이어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진화적으로 한 조상에서 갈라졌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산들바람 산들 분 다』,『나무가 있던 하늘』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