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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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77

2022.06
#봄내를 품다
하창수의 사람이야기 ⑹
역사 앞에 한결같은 사람
민주투사 관리소장님 김래용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산다는 것

“아파트가 엄청 들어섰네요.”

오랜만에 춘천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춘천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이제 아파트는 국민 열의 여섯 이상이 살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주거 형태다. 1962년 서울 마포에 처음 지어졌으니 아파트 역사도 꼭 60년이다. 샘밭의 한 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현재 근무 중인 아파트까지 관리소장으로 22년을 살아온 김래용 씨(61)는 아파트를 ‘현대사회의 첨탑’으로 정의한다. ‘첨탑’이라는 단어가 묘한데, 여기엔 아파트의 물리적 특성만 담겨 있지 않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이지만, 한 세대 한 세대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어요. 앞집 옆집은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아래윗집은 붙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이런 고밀집도와는 달리 이웃이라는 개념이 쉽게 생기지 않죠. 층간소음·흡연·주차·애완동물 등의 문제로 생기는 입주민 갈등이나 고독사 같은 현상이 만연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파트에는 관리사무소가 있고, 전문 주택관리사인 소장이 책임자다. 단지가 크면 소장만 여러 명인 경우도 있다. 해마다 발생하는 아파트 민원의 70~80%가 시설유지 관리업무가 아니라 입주민들 간의 갈등이고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관리소장의 역할도 비례해 늘어나고 고충과 부담도 그만큼 가중된다. 아파트가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한 방법을 묻자 김래용 소장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놓은 답은 ‘로제토 마을’이었다.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래용 씨  




‘로제토 마을’을 꿈꾸는 사람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산골마을 ‘로제토’. 모두가 가난하지만 이웃이 서로 빈번하게 방문하고, 길에서 만나면 멈춰 서서 담소를 나누고, 뜰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 이 마을엔 3대가 함께 사는 가구가 많다. 

올리브유 대신 돼지기름으로 요리를 하고, 단 음식을 일년 내내 먹고, 요가도 조깅도 하지 않고, 담배와 술을 즐겨 비만자들이 많음에도 심장질환을 가진 주민이 단 하나도 없어 이상하게 여긴 학자들이 연구 끝에 내놓은 결론은 ‘공동체적 결속’이었다. 


김래용 씨가 아파트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인문학동아리를 꾸려 나가는 건 ‘로제토 마을’에 대한 소박하지만 가열찬 그의 꿈의 일환이다. 80학번으로 입학해 15년 만인 1995년에 졸업장을 쥐기까지 그의 시간들을 돌아보면 환갑이 지난 지금에도 그 의 꿈이 왜 여전히 젊고 푸른지를 알 수 있다. 재수 시절 홍천 새마을 청소년중학교 야학강사를 하며 만났던 선배들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다시 만나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광주항쟁 무렵 소양로 보안대에 끌려가 한 달 넘게 고문을 당했고,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는 이른바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으로 일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냈다. 당시 3층에서 뛰어내려 요추 3·4·5번과 팔다리가 골절돼 오랜 기간 재활을 해야 했다. 지난해 6월 KBS-TV ‘열린채널’에 방영된, 80년대 학생운동권 시절 친구 세 사람과 그 자신이 주인공인 다큐 <스무 살> 은 김래용 씨가 직접 제작했다. 네 사람의 40년 전 이야기에는 당시 한국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85년 강원대학교 민주화운동 시위 장면   



민주주의, 먹고사는 것 너머  

청춘의 날들을 온전히 바쳤던 민주화 운동의 여정은 구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비로소 멈춘다. 1990년대 초결혼을 한 뒤 그는 여러 해 동안 우유와 학습지를 배달하고 컴퓨터학원 강사를 하며 생활의 벽을 넘었다. 그러나 23년차 베테랑 아파트 관리소장님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멈출 줄을 모른다. ‘전태일 노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큐를 찍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바로 알리는 책을 쓰고, 환경·여성·실업·전쟁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 정세를 낱낱이 살피며 없는 시간을 쪼개며 산다.

제일 아끼는 보물 1호가 뭐냐는 질문에 “역사 앞에 정직하고 한결같았던 것”을 꼽을 정도로 당당한 그도 고치고 싶은 성격이나 버릇이 있냐는 물음엔 의외로 “싫은 소리 못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아인슈타인과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로 살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과거의 민주화 운동이 보수화되고 노동운동 또한 계급이기주의적인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한계도 절감하게 된다.  

남은 인생에서 꼭 하고 싶은 게 뭐냐는 마지막 질문에 한 그의 대답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세계정세나 세계노동운동사 같은 역사서·사상서들을 원서로 바로 읽을 수 있게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세계노동운동사』, 『세계변혁운동사』, 『민주주의의 과거·현재·미래』 같은 책도 쓰고 싶고요. 21세기 마을공동체의 현재와 22세기를 전망하는 다큐도 만들고 싶습니다.” 

소장님 책을 읽고 다큐를 보는 그날이 꼭 왔으면 싶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 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