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껴안는 인간> 종이 위에 색연필, 정상명
지난 5월 초, 마침내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었다. 국가가 국민에게 부여한 의무가 조정된 것이다. 물론 국가는 완전 해제가 아니라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권고했다.
지난 2년여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얼굴을 가리고 살았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세계를 뒤덮은 팬데믹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곧 그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얼굴을 닫고 살아야 했다. 로마 말기에 살았던 키케로는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동물에도 존재할 수 없다. 성격을 표현하는 인간이 아니라면”이라는 말을 남겼다. 키케로는 동물에게도 성격이 있다는 것은 간과하면서, 인간의 얼굴이 곧 인간의 성격이라고 단언했다. 반쯤은 맞는 말일 게다.
생명이란 그 자체로 열린 존재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자면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서로 닫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으므로 진정한 의사소통은커녕 얼굴로 말할 수 있는 진실을 포기해야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던 지난 2년 전, 누군들 안 그랬겠는가만, 나 또한 의아했다. 이런 모순된 말의 조합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구도 외딴섬일 수 없는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사회적 존재’인데, 인간이란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외로워서 못 사는 존재인데, 거리를 두는게 사회적인 행위라니, 이렇듯 인간 본성에 반하는 어불성설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는 저항감 말이다. 그러나 마스크를 쓰고 사는 삶이 일상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어느덧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 당연한 에티켓이 되어 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나쁜 경험이었다
나는 적응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지금도 그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의 당혹감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에 반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한 지침이 빠르게 정착되고 공공연하게 권장되었다. 인간에게는 견디지 못할 상황이란 없구나, 하는 무서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들도 어쩌면 오해였을지 모른다는 의혹마저도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성공적인 방역이었겠지만, 그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은 없었을까? 타인을 잠재적인 보균자로 설정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우리의 영혼은 혹시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지는 않았을까. 그 시간은 타인이 서로 소통하는 대상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통해 확보된 불통의 대상이 되어야만 안심을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저 멀리에서부터 사람이 보이면 피했다. 공공장소에서도 서로 거리를 두면서 지나쳤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가능한 한 서로 피했다. 부득불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누가 먼저 내리든 어서 빨리 서로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음식점에서는 몇 명까지 손님을 받을지를 국가가 정기적으로 정해줬고, 모든 공공장소의 의자들 사이는 공석으로 비워뒀다.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이가 희생되었다. 바이러스로도 죽었고, 서둘러 만든 인공세균인 강요받은 백신으로도 적잖은 이가 죽었고, 지금도 앓고 있다. 백신 부국과 빈국이 발생했고, 국가를 갖고 노는 거대한 제약회사들의 농간을 느끼면서도 현생 인류의 권력 시스템은 속수무책이었다. 질병으로 이익을 얻는 단죄받지 않는 세력이 출현했으나 마스크를 벗게 된 기쁨이 그런 상처들을 모두 덮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는 살아남았지만, 그 대가는 없을까. 우리 심성 속에서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자라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제 마스크를 벗어제꼈으니 다시 전처럼 신명 나게 사는 일만 남았을까?
마스크를 벗었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일
어쨌거나 마스크 착용 의무에서 벗어나니 사람들의 표정은 환하고 밝아 보인다. 다시 거리로 시장으로 유원지로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억눌렸던 활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이 대책 없는 활기가 바로 사람살이의 원형이다. 언젠가는 코로나 사태도 종식될 것이라고 믿었고,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날이 오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자유롭게 경제생활을 하고, 마주 보고 웃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연인들은 껴안고 키스를 하고, 골목의 술꾼들은 침 튀기며 멱살잡이를 하던 예전 삶으로의 귀환이 일단 허락된 것이다. 앞날은 모르지만.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얼굴 없이 살았던 지난 2년의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왜 엄습했었던가를, 왜 그토록 많은 희생과 불가피한 고통을 치러야 했었던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를 휩쓴 팬데믹은 여러 사람이 수긍하고 있듯이 펜데믹 이전의 자연약탈적인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라고 역병의 형태로 나타난 신호였다. 누가 보낸 신호일까? 물론 바이러스는 사람의 삶에 관심이 없으므로 이번 역병을 제대로 해석해야 하는 몫은 역병을 일으킨 인간의 몫이다. 얼굴을 되찾은 해방감 속에 우쭐거리던 우리 삶의 방식과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착각에 대한 깊은 반성이 포함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욕망과 파국』, 『산들바람 산들 분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