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하늘을 가리켜 파란 하늘이라 하지 않았다. 쪽빛 하늘, 이렇게 불렀다.
쪽빛!
그 말 한마디로 우리는 하늘빛이 얼마나 깊고 고요한지 마음으로 짐작한다. 아니 오랜 유전자로서 우리는 남빛을 느낀다. 빛깔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다. 보는 것을 넘어, 살갗으로 몸소 ‘느끼는것임’을 옛사람들은 진즉에 알았다. 그래서 하늘을 닮으라고, 그래서 더 깊어지라고, 자라나는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 선생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그래서 생겨났다. 자유와 평등의 마음으로 맑게 물들여짐, 이 지극한 마음이 한울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샘밭엔 4·9장이 선다. 24일 나는 장터로 간다. 재래시장이 예전 같지는 않다지만, 샘밭 장터는 규모가 제법 크다. 역사를 지닌 오래된 장터여서 먼 데 장꾼들이 이 장터를 잊지 않고 찾는다. 이른 아침부터 춘천 시내와 양구, 화천, 홍천에서, 경기도 가평과 멀리 서울에서 손님들이 몰려든다. 온갖 물산들이 넘쳐나는 시장으로 입소문이 짜하게 났다. 갓 뽑아낸 채소들, 봄철 모종들이 길바닥을 초록으로 점령하고, 알록달록 꽃무늬 봄옷들이 장터 마당을 채색한다.
<샘밭시장 풍경> 그림 이형재
예전처럼 야바위꾼도 없고, 가짜 약장수의 신나는 입담도 구경할 순 없지만, 거대 마트에선 느낄 수 없는 훈훈한 정 이 바람결처럼 흐른다.
점심은 탁주 한 사발이면 족하다. 풋고추나 매운 장떡 두어 장이면, 소박하나마 탁주 안주로선 제격이다. 탁주 한 사발은, 묵은 시름을 말끔히 씻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식도를 타고 쩌르르, 탁주의 싸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나는 가야 할 데가 있다.
샘밭의 골목을 지나, 하늘빛을 닮은 한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분은 색깔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 그는 평생을 쪽빛에 물들여져 온 사람이다. 그렇게 쪽빛 하늘이 너울거리는, 그만의 세상을 나는 지금 만나러 간다.
퇴락하여 금세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은 정미소 삼거리를 우회하면, 오래된 소나무를 만난다. 수령 280년의 당산 목이다. 풀빛 천연염색연구소는 당산목 옆에 있다. 색바랜 나무 간판이 빨간 우체통과 동무하곤 아침못과 먼 데 마적산을 건너다본다. 입구로 들어서니 다래나무 덩굴이 무성하게 짙푸르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엔, 쪽물 들인 마와 무명천이 바람에 일렁인다. 마치 하늘 몇 장을 떼어놓은 듯싶다.
유상열 님은 뒤란 건조대에 널어놓은 염색 천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은발의 머릿결이 맑은 햇빛과 그늘 사이로 어룽거린다. 노란 치자색, 붉은 꼭두서니 색, 짙은 쪽빛 모시 천 속으로 바람이 몰래 스며든다. 색색의 빛깔들이 고요히 넘실댄다. 반갑게 맞이하는 유상열 님이 물을 끓여 손수 커피를 타 준다. 술을 못 하는 그는 스틱커피를 즐겨 마신다.
맛있게 몇 모금 마신 후, 유상열 님이 입을 연다.
“어젠 쪽 묘목을 옮겨 심었어요.” 쪽 묘목을 밭에 옮겨 심어야 본격적으로 물들임의 한 해 가 시작된다. 쪽이 귀하던 시절엔 3년의 세월을 쪽씨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겨우 쪽씨를 구해와 밭에다 심었을 때, 유상열 님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설레었다. 여느 천연염색보다 쪽빛 물들임은 오랜 시간을 보내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유상열 소장(위)과 작업장 내부
‘빛깔 냄’
이 발색을 위하여, 세심한 과정을 두루 거쳐야 한다. 침염을 내는 일은 기후, 시간, 물들임의 농도, 정성에 따라 색감이 엷거나 짙게 나타난다. 굴이나 조개껍질 등 동물성 재료도 태워야 하고, 콩대나 짚을 태우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매염은 착색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쪽물 들이는 작업은 ‘들이고 헹구고, 헹구고 들이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하늘빛을 만들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하늘마음을 닮지 않고서야 어찌 인내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 것인가.
쪽빛엔 ‘우린다, 밴다, 스며든다, 받아들이고 내보낸다, 섞인다, 변화한다, 마음으로 느끼고 기다린다’가 담겨 있다. 받아들이고 내보냄. 이 순화된 자연의 순리를 통해 발색은 제 몸의 색채를 서서히 드러내는 것이다.
중학생 때, 유상열 소년은 큰댁 형이 읽던 소설책 속에 서 ‘쪽빛’이란 낱말을 발견했다. 그 ‘쪽빛’ 한 단어가 소년의 가슴에 영혼처럼 스며들었다.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보았다. 저 하늘빛이 쪽빛 하늘이구나. 언젠가 바닷가에 갔을 때 바다 빛깔을 보고, 아 저 바다가 쪽빛 바다구나, 이렇게 소년은 마음 설레며 성장했다. 유상열 소년은 늘 마당에서 뛰어놀았고, 여름이면 식구들이 평상에 둘러앉아 마당에서 밥을 먹었다. 마당에서 당산목 소나무를 우러르며 소년은 키가 컸다. 그리고 소년은 은발이 되어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쪽 연구가가 되었다.
마당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가족의 냄새가 밴 이 마당을 유상열 님은 이때까지 묵묵히 지키며 살고 있다.이제 마당은 빨랫줄에 쪽빛 하늘이 널리고, 쪽빛 바다가 일렁인다. 늘 두 손은 쪽빛으로 푸르르다. 그의 눈에 어리는건 쪽빛의 하늘이다. 그는 혼자이지만 혼자임으로 행복하다. 그러나 조금은 외롭다.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술을 못 마시니 동네 사람과 술을 나눌 기회도 없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출근하기 위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바쁜 걸음을 생각한다. 어머니가 마당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화덕에 불을 지피는 모습을 떠올린다. 평상에 누워 시집을 읽다 쪽빛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른한 오후를 기억해낸다. 황혼 무렵, 아버지는 느긋한 걸음으로 마당으로 들어서시곤 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버지 선생님! 늘 부르고 싶은 이름이고, 지금도 가만히 읊조리곤 한다. 그렇게 가만히 부르고 싶은 또 한 분. 박복규란 이름이다. 1987년 박복규 교수의 논문을 처음 대했다. 1977년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었다. ‘한국 쪽물염색에 대한 연구’를 읽고 또 읽었다. 그 논문 이 유상열 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쪽빛은 그의 운명이 되었다. 오로지 ‘쪽 생각’밖엔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섬유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밤낮없이 쪽 공부에 몰두했다.
1990년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1997년 귀향했다. 쪽씨를 구해 밭에다 심어 가꾸었다. 그로부터 본격적인 쪽물 들이기가 시작되었다. 2008년엔 강원대학교 CT-NURI 미술 학과 지도교수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통쪽으로 농촌진흥청 주최 녹색기술 경연대회에서 장려상도 받았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강원도 산업디자인협회 산업공예분과 위원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도 했다.
인지도가 오르자, 타지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쪽염색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모임도 생겨났다. 그래서 생각했다. 쪽은 혼자만의 누림이 아니다. 쪽은 모든 이가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의 색깔이다.
이제 무얼 하시고 싶으신가요. 시민들과 쪽물을 함께 들이고 싶어요. 아, 그거 참 좋겠네요. 한두 분, 또 서너너덧 분씩 모여 쪽물을 들이다보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겠어요? 쪽빛 세상을 꿈꾸는 유상열 님은 늘 하늘빛을 닮았다. *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 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 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