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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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76

2022.05
#봄내를 품다
하창수의 사람이야기 ⑸
화려한 젊음보다 비운 충만
아름다운 노년 권태완

중년에 시작한 춘천살이 

“어릴 적 북한강변에 집이 있어서 산이 첩첩한 북쪽 풍경을 바라보며 저기는 어딜까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었어요. 그러다 중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이주하며 춘천과 인연을 맺었죠.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한 듯싶어요. 자연과 사람들도 좋고, 건강도 점점 나아진 덕에 춘천 예찬론자가 됐어요. 고향과 서울보다 더 오래 산 데다 마음 맞는 친구도 많다 보니 이젠 누가 뭐래도 여기가 고향이에요.” 


권태완 


1945년생 해방둥이인 권태완 선생(77)의 ‘춘천예찬’을 듣다 보면 공간이 사람에 미치는 영향력에 새삼 놀라게 된다. 선생의 고향은 경기도 양수리.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진학해 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를 다녔다. 제주 4.3항쟁을 다룬 명작 중편 『순이 삼촌』으로 유명한 작가 현기영, 훗날 현기영의 아내가 되는 시인 양정자와 함께 공부했다. 이후 역사학자인 남편이 춘천교대로 부임한 80년대 후반까지 서울에서만 20여 년 영어 교사로 지냈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반생을 산 선생에게 춘천이 왜 그렇게 위안이 되었는지는, 부촌의 상징인 압구정동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과 학부모들에 모두 “정이 뚝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춘천에 정착하고 선생이 맨 처음 한 것은 자원봉사. 첫 일이기도 하지만 가장 오래 한 일이기도 하다. ‘소비자연맹’ 을 스스로 찾아가 시작한 자원봉사는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 지역아동센터, 여성시민단체 등으로 이어졌고, ‘춘천여성민우회’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봉사활동과 함께 정기적인 음악감상과 독서토론, 시를 좋아하는 몇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성 시인을 초청해 수업을 듣는 시 창작 교실도 선생의 춘천살이를 보람되게 만드는 일이다. 특히 시 창작과 더불어 그림 그리기는 취미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선사했다. 



그림과 시, 뒤늦었으나 새롭고 깊은   

조용조용한 말씨와 단아한 겉모습만 보면 어려움 모르고 자란 공부 잘한 모범생을 떠올리게 하지만, 선생의 가족사·개인사에는 우리 역사의 격변과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국전쟁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오빠마저 잃고, 어머니 홀로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키운 일들은 모두 쓰라린 한국사를 공유한다  


“내 꿈속 어머니 / 아기처럼 길가에 주저앉아 / 소리 없이 울고 계셨다 / 걸을 수가 없노라고 / 애처롭게 날 쳐다보고 계셨다 / 위태위태한 다리를 건너야 / 가파른 바위산을 올라야 / 어딘가를 갈 수 있다는데 / 내 등엔 무거운 아기 / 가여운 어머니 부축하고 / 내 발도 천근만근 떨어지지 않았다”(「어머니.15」) 2005년에 펴낸 선생의 첫 시집 『북한강변 길』을 넘기다 보면 곳곳에서 그 자신과 가족들, 특히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전화도 없던 시절 / 두어 달에 한 번 / 어머닌 자취방에 불현듯 찾아오셨지 / 햇감자나 햅쌀을 했던지 / 김장을 한 뒤끝 / 잠깐잠깐 다녀가셨지 / 내 하굣길 마중 나오셔 / 쌀 한 말 무겐 되겠구나 / 책가방을 받으시며 안쓰러워하셨지 / 콩나물도 함부로 안 사 먹던 시절 / 쇠고깃국 상에 올리시고 / 더 먹어라 더 먹어라 / 막내인 내 등을 다독이셨지”(「어머니.12」) 


시인이 되려는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선생에게 어느 날 시가 걸어왔다. 첫 시집 이후 10년 만에 펴낸 『근사한 희망』에도 어머니는 사금파리처럼 빛난다. 그것만큼 도드라지는 것은 일흔에 이른 노년의 삶을 ‘회한’보다는 ‘희망’으로 돌려놓는 힘이다. 그 힘을 선생이 직접 그린 시집의 표지와 삽화 들이 후광으로 수놓는다. 그 그림들에는 선생이 최애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와 마그리트와 키리코가 떠오른다. 



권태완 선생이 그린 그림  



노년에 가능해진 탈여성의 삶  

나이가 든다는 건 누구에게나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저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선생은 그 ‘나쁘지만 않은’ 것으로 60대부터 가능해진 탈 여성의 삶을 꼽았다. 그는 아예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못을 박았다. 젊은 날의 시행착오, 어리석음, 헛된 욕심, 경쟁적인 삶으로 인한 혼란이 싫다고 덧붙인 선생은 은퇴 후 자식들이 독립을 해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면서 작으나마 사회에 봉사를 할 수 있었던 것, 허영심을 내려놓고 하루치의 삶을 자신의 주도하에 살아갈 수 있는 노년에 감사한다. 삶의 거의 전부를 여성 억압의 분위기가 당연시되던 가부장적 사회를 살아온 그에게 노년은 비로소 ‘여성’을 벗어 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가 대통령이 된 지금이 ‘역행’은 아닌지, 성찰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공부 잘하던 학창 시절만큼이나 노년인 지금을 가장 행복한 때로 여기는 선생에게 인터뷰를 마치며 “남몰래 꾸었던 꿈이 있었나요?”라고 물었다. 특유의 수줍은 미소가 번진 선생의 입에서 자그만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이제라도 마음대로 꿈꾸라면 춤꾼이나 연극배우를 하고 싶어요.” 여든의 춤꾼 배우가 봄 가득한 선생의 베란다 밖 멀리,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 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