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마을 골목
봄이다.
춘천의 봄은 공지천에서 만개한다. 나는 공지천 메타세콰이아 공원 산기슭을 오른다. 정상엔 평화의 종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종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동산엔 탁 트인 전망대가 있다. 호수 건너편 서면의 들이 보이고, 겹쳐진 산들이 굽이치고, 그 너머에 화악산이 우뚝하다.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하얀 눈이 눈부시게 덮여 있는 산. 호수는 둘레의 산속에 파묻혀 있다. 동으로 대룡산, 북으로 가덕산과 화악산, 남으로 금병산, 서으로 삼악산이 호위한 호수는 아름다운 전설을 품고 있다. 평화의 동산에 오르려면 은둔의 마을을 지나야 한다. 아니 육지의 섬이라 해야 옳다. 외지 사람이 이 마을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마을로 진입하는 큰길은 한 군데뿐이고, 마을은 오목하니 숨어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좁은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좌우로 뻗어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그늘진 곳에 앉아 있다. 큰 도로에서 약간 경사진 비탈을 오르면 골목이 Y자형으로 갈라진다. 한 40호 정도 될까. 그마저도 집이 비어 있거나 허물어진 폐가가 군데군데 드러난다. 적막하다.
호수에서 건너다 본 평화의 종 공원과 아파트군
어느 집에선가 낮게 개가 컹컹 짖고 있다. 송암 은둔의 마을은 청소년도서관 길목에서 절간처럼 엎드려 있다. 옛날 경춘로는 서울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예전엔 번성한 마을이었을 터였다. 이제 춘천은 아파트 시대를 맞이했다. 고층 건물이 하루가 다르게 쭉쭉 솟는다. 옛날 집들은 그늘로 덮이고, 하나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마을 골목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끊긴 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나는 정감 있는 한 목조가옥을 발견한다. 참 편안하다. 고요하고 고요하여, 명상에 잠긴 듯한 집. 석양 무렵 한 나그네가 찾아온다면, 주인은 미소를 머금고 손님을 맞이할 것이다. 맑은 차 한 모금으로 오랜 여정의 피로를 풀게 될 집. 그런 집이 은둔의 골목길엔 있는 법이다. 나는 이 집을 ‘톨스토이의 집’이라 이름하고 싶다.
공지천 그림 이형재
전망대에서 바라본 호수.멀리 화악산이 보인다.(왼쪽) 송암저수지
동산에 올라 저 멀리
평화의 종 동산엔 신선한 바람결을 느낄 수 있다. 눈앞엔 공지천의 따뜻한 봄나들이가 한가득 펼쳐진다. 김소월의 시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처럼’ 나는 다소곳이 눈길을 주기만 하면 된다. 세상의 봄이 내 안에 그득히 차오른다. 저 아래쪽 공지천은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온통 화사한 꽃이다. 설렘의 꽃송이가 한 다발 한 다발 피어나 흔들린다. 분홍이 흔들리고, 노랑이 흔들리고, 하양이 흔들린다. 온갖 색채의 흔들림이 가멸게 느껴오는 봄.
벚꽃, 목련, 진달래, 개나리, 찔레꽃, 복사꽃, 살구꽃, 그리고 내게만 이름을 감춘 꽃들 꽃들… 이 모두 ‘눈부시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춘천은 언제나 봄이라고.
삼천동엔 번화한 사거리가 있다. 춘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과 춘천호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이 서로 교차하는 곳이다. 닭갈비집, 한식집, 중국집, 막국수, 칼국수집, 작은 마트 들이 오밀조밀 모였다. 10년 전엔 드문드문하던 집들이었다. 은둔의 마을 건너편은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음식점 거리가 되었다. 은둔의 마을만이 깜박깜박 반딧불이 같은 빛을 발할 뿐이다.
건너편 동산에서 나는 최근 우뚝 솟아난 아파트 건물을 마주한다. 아주 오랜 옛날엔 황토흙뿐인 언덕이었다. 저기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나의 친구 준열이도 저기 어디쯤에 묻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묻고 이듬해 아들 곁으로 떠났다. 나는 그 황량했던 그의 무덤에다 주변 들꽃을 꺾어다 놓아주었다. 아마 하얀 조팝나무꽃이었을 것이다. 그날, 길 건너 맞은편 산에선 뻐꾸기가 울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친구의 무덤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과수원이 조성되었고, 그 과수원 자리에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섰다. 지난 시간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간다. 그저 아득하고 아득하다.
아주 오래전, 너무나 오래전 일이었다. 나는 석사동을 출발하여 코끼리 산을 바라보며 걸었던 적이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참나무들이, 참나무 숲 사이로 소나무들이 보였다. 그 사이사이로 환한 산벚꽃과 참꽃 무더기들이 수채화처럼 찬연했다. 나는 오래 걸어, 골짜기에 고인 송암저수지에 닿았다. 손바닥만 한 붕어가 꽤 잡혔다. 고적한 저수지 계곡을 타고 뻐꾹뻐꾹 뻐꾸기가 울었다. 친구의 무덤에서 듣던 그 뻐꾸기 울음이었다. 그 한없이 멀던 뻐꾸기 울음은 산의 적막감을 한층 더해 주었다.
이제 나는 손쉽게 송암저수지로 갈 수 있다. 산이 뚫리고, 걸이 넓혀지고, 산언덕이 평지가 되어 학교가 세워졌다. 드넓던 송암저수지는 절반도 안되게 좁아졌다. 저수지 옆에는 강원체육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저수지 상류는 지금 사격장 건설이 한창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호수. 멀리 화악산이 보인다.(왼쪽) 송암저수지
농부시인의 마을, 자라우
저수지에서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고갯마루 근처에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자라우 마을이다. 자라 별鱉, 자라 오鰲 자를 써서 별동리, 오동리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아래 저수지에 자라바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지금은 그 바위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마을은 원래 차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지금 차씨들은 대부분 떠나버렸다. 현재 아홉 가구만 남아 있다. 차창호 시인은 비닐하우스 오이 농사를 짓고 있다.
놀랍게도 이 마을엔 청오 차상찬 언론인의 생가터가 있다. 지금 그 생가터엔 외지인의 집이 들어섰다. 차상찬 선생은 1920년 방정환 선생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을 창간한 분이다. 차상찬의 묘는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데, 몇 해 전에 일가붙이가 충청도로 이전해 갔다. 차시인은 그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아버지 대를 이은 농부 시인 차창호. 그의 첫 시집은 『아버지의 꽃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구었던 밭을 다시 아들이 갈아엎으면서 차창호 시인은 명상하듯 깨닫는다. 아버지와 내가 주고받는 말이 왜 꽃말이어야 하는지 몇 년, 밭을 갈고 나서야 알았다
- 아버지의 꽃말 중에서
차창호 시인은 한없이 부드러운, 바람결 같은 시인이다. 자라우 마을을 지키는 코끼리산에 노을이 지면, 차창호 시인은 일하던 농토에서 돌아와 닭장에 모이를 준다. 다섯 마리의 청계는 하루에 꼭 다섯개의 알을 낳는다 한다. 차시인의 노모, 아내, 아이 둘, 그리고 시인. 이렇게 다 섯이 한 알씩 먹으라고 낳는거 같다고. 그런 귀한 푸른빛 달걀 열 개를 선물받았다. 노모가 뜯어온 봄나물도 받았다. 돌아올 때 나는 생각했다. 차씨 거인이 자라바우를 들었다 놨다 했다는데, 혹시 그 거인이 자라바우를 옆구리에 끼고 용궁으로 떠난건 아닐까. 그 생각이 부질없음에도, 어쩌면 아름다운 전설 하나 생겨날 듯싶은, 신비한 노을의 저녁이다. *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 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 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