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황토마을'을 아시나요?
전원, 전람회, 비탈에 선 카페, 북 치는 소년, 바라…. 서정적인 문학작품에 등장할 듯한 이 이름들은 한 시기 춘천의 낭만을 책임졌던 카페들이다. 카페보다는 다방이 더 친숙하던 시절, 머리를 치렁하게 기른 청년작가 이외수가 뮤직부스 안에서 엘피판을 고르며 디스크자키를 했다는 음악 다방과 거북당이니 뉴욕제과 같은 빵집도 카페 역할을 하던 때였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보다 춘천을 커피와 가깝게 만들어준 공지천변 ‘이디오피아’도 빼놓을 수는 없다. 내가 춘천으로 이사를 온 1990년대 초반엔 이들 대부분이 사라 지고 꽤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번개시장 봉의산 자락에 있는 카페 ‘봉의산 가는 길’ 주인장 노정균
‘황토마을’이라는 매우 토속(!)적인 이름의 카페를 알게 된 것은 춘천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져 아는 사람들도 여럿 생겨난 90년대 중반이었다. 신문기자로 있던 후배가 “좋은 곳을 소개해주겠다”며 춘천 외곽 샘밭 초입새 지금의 한샘고등학교 부근으로 데려갔는데, 맨땅에 자갈이 더북이 깔린 공터에 초가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웬 귀곡산장으로 데려가냐?”는 내 물음을 들었는지 출입 문을 밀고 들어가자마자 주인장의 껄껄 웃는 소리와 마주 쳤다. 그렇게 노정균(65)이라는 대책 없는 긍정주의자와의 20년 인연이 시작되었다.
사회학자에서 카페주인으로
몇 번 만나지 않아 주인장과 형 아우로 지내게 된 덕분에 명문대 출신에 멀쩡한 허우대와는 사뭇 다른 ‘과거사’도 제법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벼락처럼 닥친 가난과 ‘안 해 본 것 빼고는 다하며’ 버텨낸 청소년 시절,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이트클럽 웨이터보조를 하며 모은 돈으로 학원에 등록해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대목에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갔으나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학교 청소, 대리 당직, 파출소 방범, 도서관 학생 근로 등 열 개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놓치지 않았던 사회학자의 꿈이 어떻게 생면부지의 춘천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까. 여기엔 미국 서부 연안 여행이라는 난데없는 그림 한 장이 걸려 있다.
굴지의 벽지회사를 거쳐 절친한 친구와 중소규모 광고 업체를 함께 잘 운영하던 그에게 어느 날 까닭 모를 회의가 닥친 건 30대 후반. 난생 처음 미국여행에 나선 그를 사로 잡은 건 LA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의 덴마크’ 솔뱅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곳곳에서 마주친 카페들이었다. 아스라한 바다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대부분의 주인들이 은퇴한 노부부라는 사실에 충격이라 할만한 감응이 일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그때 든 생각의 전부였다. 그 생각을 안고 귀국한 그가 찾은 곳이 춘천이었고, 백여 곳 넘게 돌아다니다 점지하듯 만난 곳에 ‘황토마을’이 들어섰다.
번개시장 봉의산 자락에 있는 카페 ‘봉의산 가는 길’ 주인장 노정균
문화사랑방 주인장의 철학
시골집 같은 분위기, 차와 음식과 술을 따로 따로가 아니라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신개념’ 카페 ‘황토마을’은 “한 번도 오지 않은 손님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손님은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엉덩이를 붙이면 일어날 줄 모르는 붙박이 손님들 중에 유난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았던건 그들의 얇은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그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교사·군인·학생·직장인 등 손님층도 두터웠다. 무전여행을 온 젊은 친구가 며칠씩 묵어갔다는 풍문도, 유명한 목사와 스님까지 아울렀던 그의 종교적 아우라도, 대개는 사실이다. 노정균의 넓고 깊은 오지랖은 춘천 문화계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람, 경조사 소식을 맨 처음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그가 ‘황토마을’ 시대를 끝낸건 90년대 말, 옥천동을 거쳐 지금의 소양1교 봉의산 초입으로 옮겨 ‘봉의산 가는 길’ 을 열었을 땐 그의 나이도 어느새 60대를 향해가고 있었다. 올해로 카페 운영 28년이다. 별의별 손님을 다 맞았을 그에게 몇 사람만 들어보라고 주문하니 대뜸 ‘고객 많이 데려 온 사람’을 첫손에 꼽았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문화예술인이다. 그 안에 가수 양희은, 영화감독 이장호, 시인장 석주가 들어 있다.
‘비록 어리석긴 하나 아직 크게 아픈데 없이 살아주는 나, 더 정갈한 맘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나’를 보물1호로 여기는 그.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소설을 읽으며 꾸었던 비행사의 꿈도, 헤세의 『싯다르타』와 카잔차키스의 『조르바』 톨 스토이의 『인생론』 실비아 브라운의 『저세상 이야기』를 최애하는 만년 문학청년의 기세도 여전한 사람. 그를 보면 높지는 않지만 낮아보이지도 않는 봉의산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행성에서 저마다의 운명을 갖고 살아가는게 느껴져.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이 안되면 차선을 다하며 사는 미니멀 라이프가 어릴때 부터 체질이 된 탓인지 절망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좌절에까지 가진 않아”라는 그의 철학과 묘하게 상응한다. 봉의산 자락 그의 ‘사랑방’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 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