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녹색’ 하면, 푸른 숲, 대양의 건강함, 눈 덮인 설산, 하늘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철새들,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자체의 원리와 질서가 있어서 인간이 개입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들끼리 나눌 수밖에 없는 ‘녹색 이야기’ 의 가장 궁극적 핵심은 쓰레기 문제다. 산업혁명 이후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면서 인간이 꾸준히, 열심히 해온 일이 쓰레기 생산이었다. 그 엄청난 쓰레기가 일으킨 재앙이 곧 녹색 이야기의 기본이고, 핵이고, 뿌리고, 전부 다다. 기후변화, 기후위기, 지구생명체들의 절멸, 역병의 창궐도 결국은 인간의 전천후 소비 활동의 부산물로부터 야기된 심각하고 무서운 사건이다.
플라스틱 태우면 다이옥신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28년쯤 전, 나는 서울의 노원구 하계동에 살았다. 마들평이라고 불리던 대단지아파트가 생긴 곳이었다. 거기에 조그만 아파트를 분양받아 아침마다 일어나 면서 행복해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수천 명의 전투경찰의 보호 아래 ‘상계쓰레기소각장’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1993년 8월 30일이었다. 짓겠다는 서울시와 시공자인 에너지관리공단은 ‘자원회수시설’이라고 불렀고, 시민들은 ‘소각장’이라고 불렀다. 시민들은 그 화려하고 유용해 보이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도를 막는 시위에 돌입했다. 주걱으로 냄비 양동이를 두드리는 주부 데모단이었다. 여러 날 시위가 벌어지면서 퇴근하는 차량이 미아리부터 정체되자 ‘9시 뉴스’에 첫 뉴스로 보도될 지경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시위를 이끄는 이들이 부동산업자들이었다. “소각장 들어서면 아파트값 떨어진다”는 피켓이 보였다. 사람을 참 쓸쓸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구호를 지켜보다가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도로점거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시위는 안된다. 왜 소각장을 지어야 하고, 어떤 소각장을 짓겠다는 것인지 공부를 좀 해서 어른스럽게 대처하자”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로 인해 봉변도 당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대책위 원회를 만드는 데 6개월이 걸렸고, 그 후 3년여 미친놈처럼 그 운동에 빠지게 되었다. 내 주장의 골자는 “우리 동네는 안 된다가 아니라 우리도 쓰레기 배출하면서 살 수밖에 없으니 제대로 잘 짓자”였다. 나중에는 그린피스 폐기물담당 자도 마을에 불렀다. 그는 “이것은 범죄다”라고 단언했다. 우리나라 소각장의 건설비는 독일의 8분의 1이었던 것이다. 그 1도 30%로 H건설에 낙찰되어 짓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뒤 8기 건설을 4기로 줄이고, 산업폐기물 안 받기로 했고, 6종 분류 종량제라는 제도를 간신히 얻어냈다.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도 안전하게 짓고 가연성만 태웠다는 소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몸을 지난해 ‘처음으로’ 조사해봤더니 평균 1,455ppt의 다이옥신이 검출됐다. 이는 인근 주민들의 평균치보다 무려 14배 높은 수치였다 (교통방송 2022년 3월 8일 보도). 소각장 노동자들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쓰레기는 계속 양산되니까 더 큰 소각장을 지어야 한다”는 책임 안 질 소리를 한다. 업체의 나팔수들인 그들은 소각장을 더 지어야 하는 이유를 대량소비를 전제로 굴러가는 산업사회 구조에 돌린다.
선량한 시민들이 할 일은 종량제 비닐봉투를 사고, 나름 성의껏 6종 분류해서 배출하는 일뿐이다. ‘태워없앤다’고 인쇄된 비닐봉투에 태우면 안 되는 비닐봉지에 가득 찬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를 꾹꾹, 눌러 묶으면서 양식 있는 사람들은 늘 고통을 느낀다. “이거 태우면 안 되는데, 이것 묻으면 안 되는데” 중얼거리면서. 어쨌거나 ‘분리배출’된 쓰레기는 대부분 ‘통합수거’해간다. 물론 재사용, 재활용을 안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배출량에 비하면 코딱지만큼 정도다. 전에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쓰레기 신전 神殿 > 종이 위에 색연필, 2022, 정상명
쓸데없는 것 그만 만들고, 아껴 쓰고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입 가진 사람들 모두, “석유시대는 갔다, 대체에너지 개발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이 답이다, 탄소중립을 실현해야 한다. 그래야 수출도 하고 잘 살 수 있다, 원전原電은 위험하므로 폐기해야한다, 아니다…” 등의 담론으로 시끄럽다. 그런데 그 진지한 얘기들 속에 ‘불필요한 생산’을 억제하고, 아껴 쓰고 다시 쓰자, 그래야 살 길이 열릴 것이라 는 소리는 안 들린다. ‘불필요한 생산-대량소비’가 근간인 산업사회는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없는 수요’를 창출해서라도 자연을 수탈하는 것이 장려되는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생긴 과실果 實은 ‘20대 80’으로 고착되고, 지구환경은 파멸적으로 가속화된다. 그런 구조가 요지부동인한, 기후위기의 완화나 지연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하고 고약한 쓰레기는 ‘핵쓰레기’ 다. 그것은 인류가 아직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한 영역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준위폐기물의 반감기는 10만년이라는 설도 있고, 몇 백만년 몇 억년이라는 설도 있다. 원전 만능 주의는 그런 의미에서도 위험하고 불안한 대처법이다. 쓰고 버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욕망과 파국』, 『산들바람 산들 분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