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미술의 젊은 대들보
정현경(48) 씨가 하는 전시기획은 비유하자면 저마다 다른 빛을 발하는 구슬을 꿰어 하나의 보배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가 지난 가을 거두리에 ‘개나리미술관’을 연것도 그런 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 방언을 주조로 한 부친의 서예 작품들을 직접 민화로 재해석한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진가는 전시기획에서 드러난다. 작년 11 월 스무날 남짓 이어지며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요람에서 무덤까지>전은 춘천과 관련을 가진 작고 화가와 신진화가의 ‘콜라보’라 불릴 만한 전시회였는데, 그가 기획과 운영을 전담했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10년 가까이 웹디자이너로 일했어요. 그러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춘천으로 옮겨오면서 이 사를 했는데, 뜻밖에 ‘미술’과 만났죠. 미술은 표현방식이 시각적이지만 본질은 철학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자신만의 스토리와 내면의 의식을 작품에 녹여 내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받는 감동이 컸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인 제주를 떠나 대학에 다니던 1990년대, 새벽 기차에 오르며 처음 인연이 닿았던 춘천. 고등학생인 큰아들이 유치원생이던 2011년 이사를 와서 꽤 오랜 시간 이방인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도 타향이었으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춘천은 유달리 낯설었다. 그러다 2015년 강원 민미협(민족미술협회) 사무 국장으로 직접 전시를 기획하고 운용하면서 미술과 춘천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대안공간으로 2년간 꾸려나간 ‘명동집’, 젊은 화가들과 함께 거닐었던 ‘예술밭 사이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마련한 ‘터무니창작소’를 거친 뒤 강원국제예술제(트리엔날레)에 큐레이터로 참여하며 토대가 다져졌다.
개나리미술관 정현경 관장
야생마, 몰입, 일관성
반복성이 강한 일보다 성격상 스스로 계획하고 구상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 작업에 더 잘 몰입한다는 그에게 전시기획은 체질에 맞았다. 앞만 보고 내달린다며 친구가 붙여주었다는 ‘야생마’라는 별명에도 걸맞은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상과 현실이 충돌할 때는 어디를 따르느냐고 물었을 때 “현실과 충돌하는 이상 같은 걸 아예 꿈꾸지 않아요”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 가고 싶은 방향을 따라 걸어왔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러다 보니 일에 빠지면 쉽게 뒷전이 되어 버리는 보물 1호인 남편과 두 아들에게 늘 미안함을 덜어 내지 못 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예술가 얘기를 나눌 땐 뜻밖의 인물들이 나왔다. 연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을 작업화한 쿠바 태생의 미국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가장 사적인 것이 대중에게 전해지고 공감되는 방식’이 아름다워서 좋아한단다.
33세에 홀로 돛단배로 북대서양을 건너는 퍼포먼스를 하던 중에 실종된 네덜란드의 바스 얀 아더르의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는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인데 보고 있으면 그의 슬픔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나온 배우 리버 피닉스와 장국영, 뮤지션 커트 코 베인까지 하나같이 요절한 예술가들이다. 이 이름들이 뜻밖이다 싶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면 그 일관성에 고개 가 끄덕여진다. “아무래도 저는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가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 슬픔이 삶과 일체가 되어 버린 작가를요.”
개나리미술관 내부 모습
전시기획자가 꾸는 문화도시의 꿈
그가 운영하는 ‘개나리미술관’에서는 <룸room>이라는 이색적인 그룹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 다섯 명의 페르소나와 같은 ‘방’들을 전시장으로 소환한 기획인데, 다섯 개의 방을 만들기 위해 가벽 공사를 하는 등 공을 많이 들인 전시다. 3월 초순에 끝나는 터라 서둘러 미술관으로 향하다가 ‘춘천미술관’에 대해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춘천은 21세기로 넘어오기 전부터 문화도시로 불리었지만 전국에서 시립미술관이 없는 몇 안 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죠. 국공립 미술관은 지역에 전시공간이 생기는 차원을 넘어 지역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절실한 사업이에요. 작고한 작가의 작품들이 보존되지 못한 채 유실되어 버리는 것도,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작가들이 활동하는 지역임에도 시각예술 분야의 기획인력이 매우 드문 현실도 안타까워요. 춘천미술관이 건립돼서 다양한 시각예술 기획을 바탕으로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고 지역 미술사의 지평을 열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훗날 고향 제주의 중산간 마을에 집을 짓고 농부로 살고 싶어 하는 그이지만 아직은 미술을 꿈꾼다. 구상 중에 있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전시도,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공공미술적인 설치 작업도, 모두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다. 머지않아 춘천의 곳곳에 활짝 피어날 노란 개나리처럼 그의 능력과 개성이, 미술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개나리미술관’에 만개하길 빈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 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