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왜 환경운동을 하는가?”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를 베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소설이나 쓰시지?” 하는 문학주의자의 유치한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폼나게 들릴 수도 있는 그 대답이 아무리 생각해 도 틀린 대답이 아닌 것 같아서 대답해놓고도 잠시 더 생각해 보았다. 내 답변의 ‘나무’가 단지 나무만이 아니었는데, 그가 더 묻지 않은 게 거기까지 이해했나 보다, 하고선 안도했다.
이때 ‘나무’는 내 어린 시절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답던 바다를 뜻하고, 댐 짓겠다는 소동에서 간신히 살려낸 ‘동강’일 수도 있고, 멀쩡하던 갯벌을 농지로 만든다고 죽여버린 ‘새만금’일 수도 있고, 잘 흐르는 강에 보를 만들어서 강 의 흐름을 잘라버린 ‘4대강’일 수도 있고, 단 사흘간의 알 파인스키장을 위해 500년 된 수림을 베어버린 ‘가리왕산’ 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인류의 일원이다
‘한 사람’의 형성이나 그가 영위하고 있는 생은 아무렇게 나 막 생겨서 대충 대충 얼렁뚱땅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인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가 그런 생각을 지니고 그 생각 때문에 어떤 일은 열심히 하고, 어떤 일은 한사코 하지 않는 것은 겉보기와 다르게 모두 다 곡절이 있고, 어쩌면 자신도 잘 모르는 필연성이 있다고 본다.
고등 시절에 시 한 편을 만났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 리나>였다. 헤밍웨이의 소설로 더 널리 알려진 제목이지만, 그것은 16~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단의 시제詩題였다. 헤밍웨이가 존 단을 차용한 것이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지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로 시작하는 그 시 는 동해안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한 소년에게 만약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의 금선琴線을 퉁겼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 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로 이어지는 시는 철 없던 소년을 전율시켰다. 아아, 세상에 이런 시선과 해석도 있구나. 이후 나는 내가 그때까지 가까이에서 본 죽음, 멀리서 풍문으로 날아온 죽음, 역사책에 가득 찬 죽음의 기록 들까지 존 단의 시가 가르쳐준 원칙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시인은 이어서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며,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로 말을 마쳤다.
소년에게는 바로 너를 위해 울린다는 종보다는 네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 더 뜨거웠다. 너무나 크고 강력한 인류의 일부에 자신을 편입시킬 능력은 부족했지만, 그 시는 소년에게 자부심과 함께 책무라 말해도 되는 압박감을 동시에 요구했던 것 같다. 비록 소년이 이후 전개한 삶이 좌충우돌이었고, 종횡무진이었지만, 그때 그 몇 마디 단어가 소년에게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 당연시하는 자국 민족주의나 자연의 정복이 인간의 권리라는 성장주의 나 “너를 밟아야 내가 산다”는 공격성이 얼마나 추하고 남루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동백나무를 지붕 삼아 쉬고 있는 새들. 사진 연합뉴스
자연의 손실은 곧 우리의 손실이다
그러다가 20대 초반에 또 한 명의 이인異人을 만났으니 H.D.소로였다. 소로의 숲속생활 일기인 『월든』은 출간 때에는 몇 권 안 팔렸지만 지금은 인류의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특히 잊을 수 없는 소로의 감성은 소나무 한 그루가 베어진 뒤에 소로가 표했던 슬픔과 탄식이었다.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던 하늘은 앞으로 200년간 빈다. 소나무는 이제 재목이 되었다. 소나무를 쓰러뜨린 사람은 하늘을 파괴했다…. 강둑을 다시 찾아온 물수리는 앉아서 쉴 익숙한 나뭇가지를 찾아 빙빙 맴돌아도 못 찾을 테고, 매는 새끼들을 지켜줄 만큼 우뚝 솟았던 소나무들의 죽음을 슬 퍼할 것이다”라면서 소로는 “왜 마을의 종은 애도의 종소리를 울리지 않는가. 애도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거리에, 숲길에 행렬이 하나도 없다”(소나무의 죽음)며 탄식한다.
존 단의 조종弔鐘이 소로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자연(소나무)의 일부인지라 그 손실은 곧 우리의 손실이다. 진정 무엇을 애도해야 하는지 우리는 잊어 버렸다.
나무를 베고도 얻을 게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최성각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생태주의 작가.
‘삼보일배’나 ‘생명평화’ 같은 개념을 창출했다. 요산문학상, 교보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최근에 『욕망과 파국』, 『산들바람 산들 분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