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반듯, 안은 치열
이태검(27) 씨의 첫인상은 예의 바른 청년 그 자체다. 그가 보여주는 예의 바름은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까닭 모를 반감을 온전히 불식시킬 만하다. 그런 그의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다른 면모들과도 만나게 된다. 김유정 문학촌이 소장한 자료들을 분석 정리하는 일을 하던 그를 2020년에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참한 청년이었는데 이듬해 토크콘서트 촬영과 편집작업을 맡아 전문가 뺨치게 해내는 그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내 휴대폰 연락처에 ‘이태검 감독’이라고 적힌건 그 때문이다.
“대학(강원대 신문방송학과)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DSLR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을 독학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미디어 프로덕션을 창업해 1인 다역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야말로 영상업계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원래 그렇게 도전정신이 강했냐고 물었을 때 예상 못 한 답이 나왔다. 순종적이고 수동적으로 살아와서 꿈도 가치관도 정립되지 않은 채 남들 가니까 따라가는 식으로 대학에 들어간 뒤 관심 가는 것은 무작정 시작했다는 그. <고시원 연쇄방화사건>이란 2시간짜리 학내 연극에선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고, 사회인 밴드에 들어가선 막내 드러머로 활동했다. 공익근무로 치른 군생활까지 대학 안팎을 드나들며 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치열하게 부딪은 그에게 드디어 꿈이 하나 생겼다. 아나운서였다.
아나운서를 꿈꾸다
“방송인을 염두에 두고 학과를 택한 건 아니었지만 제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교집합이 아나운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하루하루를 채워 가고 있습니다.”
아나운서가 꿈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부드러우면서도 공명이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가 새삼 돋아 들린다. 그러고 보면 ‘이제’니 ‘음’이니 하는 췌사들을 쓰지 않는 건 물론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쪽에 올려놓은 반듯한 자세 또한 영락없는 아나운서의 그것이다. 어떤 아나운서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주부 대상 아침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싶단다. 꼭 하고 싶은 건 라디오. 그래서일까, 존경하는 방송인으로 30년 넘게 모든 일상을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 (음악캠프)에 맞춘 채 살아가는 DJ 배철수를 꼽았다. 3학년때 KTV(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일하고 얼마전 충남의 한 지역 인터넷방송국에서 잠시 일한 것 외엔 경쟁이 치열한 분야라 아직은 언론고시 취준생이다. 문득 ‘열정페이’니 ‘ 아프니까 청춘’이니 하는 말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누구나 작든 크든 불행은 겪기 마련인데 중요한 건 그 불행에 매몰되지 않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모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다르게 생겼고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잖아요. 청춘들이 정답을 강요하는 이들의 말에 혹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오답일지라도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타인이 ‘나’의 인생을 통제하게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꿈을 향해 가다가 발목이 잡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주관 또렷한 이 청년을 정말 아프게 만든게 있었다. 절친했던 친구 둘을 차례로 떠나보낸 일이었다. 그땐 모든 게 혼란스러워 대관령의 한 리조트에서 침구 정리와 쓰레기 처리를 하며 한동안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김유정문학촌 수장고를 정리 중인 이태검 씨. 사진 이원일 명예시민기자
꿈 많은 청년의 베이스캠프, 춘천
고등학교까지 강릉에서 살다가 대학에 입학하며 살게 된 춘천을 그는 ‘베이스캠프’라고 표현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며 자신을 비로소 알게 해준 곳, 그리고 아나운서의 꿈을 키워 가는 곳이란 의미다.
길가의 고양이, 따뜻하게 내리는 함박눈, 잘 내려진 커피 한 잔, 친구와의 통화, 추억이 담긴 사진,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낯선 이의 배려까지, 크고 작은 행복이 있는 하루하루를 너무나도 큰 보물로 여기는 따뜻한 청년.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극복하고 싶고, 겸손하면서도 누구에게나 당당한 사람이고 싶다는 청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홈카페를 만들고, 아마추어 카레이서가 되어 작은 대회에 출전하고, 60세가 되었을 땐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오랜 전통을 가진 프랑스의 양조장에 가서 와인을 시음하고, 아이슬란드로 8박 9일 동안 여행을 하고 싶다는 청년. 그의 얘기를 듣고 나서 불쑥, 영화 <기생충>의 대사를 써먹었다.
“태검 씨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싱그럽게 살아가는 청년 이태검에게서 멀기만 한 봄내음을 미리 맡은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하창수
소설가이며 번역가. 춘천으로 이사 온 지 30년, ‘경상도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괜히 섭섭해지는 춘천사람이다. ‘사람 이야기’는 춘천에 살면서
그 가 알게 된 사람, 그 누군가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