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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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73

2022.02
#봄내를 품다
최성각의 녹색이야기 ②
A4 한 장에서
A4 한 장에서 구름을 본다

20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틱낫한의 책에서 ‘종이 한 장에서 구름을 본다’는 구절을 본 때는. 틱낫한은 달라이 라마, 에크라흐트 톨레와 함께 현존하는 세계 3대 영적 지도자라고 불린다. 영적 지도자들은 깊은 내용을 간명하게 말하고, 대부분 시적詩的이다. 틱낫한도 그랬다. 그가 한 말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연인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다고 하자. “그 종이 속에서 구름이 안 보이냐?”고 틱낫한이 묻는다. 그의 이야기인 즉 이렇다. 

종이는 펄프로 만든다. 펄프는 나무에서 얻는다. 나무는 나무꾼이 도끼를 들고 산에서 벤다. 나무꾼은 나무를 자르다가 땀이 나면 그늘 아래 앉아 땀을 훔친다. 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얼굴을 맡긴 채 먼 산을 향해 고개를 쳐드니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그런즉, 종이 한 장에는 베어진 나무와 그걸 자르던 나무꾼이 쉬다가 쳐다본 구름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스님인지라 이 이야기는 연기緣起에 대한 우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님이 의도한 말의 진핵眞核이 뭣이었든간 에, 그 후 나는 종이를 볼 때마다 구름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게 만든 코로나

코로나 사태가 3년째 접어들고 있다. 정말 힘들다. 야생(박쥐라 하자)에 깃들여 살던 바이러스가 한번 인간세에 튀어나오자 돌아가지를 않는다. 이 행성의 주인인 양 뻐기고 경계를 허문 인간들이 자신들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꼴이 흥미롭나 보다. 인간의 필사적이고 적대적 방역으로 바이러스들도 계속 잡종변이를 거치면서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안 보인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쓰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하다가, 백신이 나온 뒤에는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신념에 따라 백신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거듭되는 백신 투여로 코로나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면서 빈국과 부국 간의 백신 불평등 문제도 대두되었다. 어느 한 나라가 코로나를 이겨냈다고 해도 코로나로 고통 받는 다른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극복이라 할 수 없건만, ‘불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한계는 코로나 대처에서 도 여실하게 드러났다. 그뿐인가. ‘거리 두기’는 21세기 벽두에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인류의 기본 매너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은 본래 거리 없이 살아야 하는 호흡공동체인데,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숨을 쉬어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고 하니, 인간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이 지침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 식탁 옆에 앉아 있는 사람, 같이 웃었던 사람이 ‘바이러스의 활동처’인지 모르므로, 서로 겁을 먹는 것이 예의가 되어버렸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에 ‘궁즉통窮則通 극즉반極則反’ 이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통하고 극에 이르면 더 갈 곳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코로나도 필경 끝날 것이다. 죽음을 담보로 한 인간의 다양한 저항으로 결국 코로나는 인간이 탄생하기 전부터 있었고 같이 살아왔던, 대단히 심각하지 않은 바이러스들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구름 아래서 코로나19 방역 작업을 하고 있는 119 대원들. 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코로나로 우리가 얻은 것도 있다 

지금은 비록 재난의 한복판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우리가 코로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가 준 이익이라고 말하면 돌 맞을 소리지만, 코로나로 인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우리가 알고 보니 대단찮은 존재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다. 이 행성이 예닐곱 개쯤 되는 줄 알고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성장’이라는 광기에 휩싸여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파괴해 왔다. 모든 것이 돈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돈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궁극적 수단인 줄로 알았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고 한다. “문제를 일으킨 자들은 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우리가 문제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으니 아인슈타인이 틀린 셈이다. 우리는 알고 보니 우리가 매우 허약한 토대 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에도 코로나 이전의 삶처럼 살다가는 더 큰 파국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은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A4 한 장에도 구름이 흐른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만약 우리 모두 종이 한 장에 구름이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장의 비명소리에만 신경을 쓰는 척하는 정치가들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토록 극심한 코로나의 고통 속에도 그들은 여전히 ‘경제성장 타령’이지만. 궁하니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게 될 것이다. 


* 1월호 <녹색 이야기>의 ‘공빈공락共嬪共樂’은 ‘공빈공락共貧共樂’이 맞는 표기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최성각

‘한국의 대표적인 생태주의 작가’로 불린다. 새나 돌멩이 등 비인간에게 참회를 표하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벌였다. 건양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요산문학상, 

교보환경문화상을 받았다. 3만 여권의 책더미가 있는 툇골에 파묻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