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형재
- 성탄 전야
2002년 12월 성탄 전야.
한 사람이 소양로 골목길을 오른다. 어둡고 좁은 골목길 은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 사람은 희미한 불빛 내비치는 집의 문을 밀어 연다. 그는 냉골의 방안에서 오들 오들
떨고 있는 노인을 만난다. 전기장판과 이불이 노인의 체온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저녁은 드셨어요?
이 물음에 노인은 아무 대꾸도 없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 그는 밖을 나선다.
문 옆 연탄 광엔 연탄 한 장 없다.
골목길이 너무 가파르고 좁아 연탄 배달 차량이 올 리가 없다. 힘없는 노인이
연탄을 두 손에 꿰고 언덕을 오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 사람은 이곳저곳 불 꺼진 집이나 희미한 불빛의 집들을 방문한다.
성탄의 밤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따뜻한 밥 한 끼, 따뜻한 연탄 한 장을 생각한다.
따뜻함이 사라져버린 이들의 고난을 눈으로 목격하니 눈 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 연탄은 눈물이지.’
그리고 노인들의 목소리가 한결같음을 마음속에 새긴다.
‘겨울엔 연탄이 밥보다 더 중해요.’
캄캄한 하늘에서 조용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거룩하고 슬픈 밤이다.
- 작은 사랑 아름다운 세상
2004년 10월 1일.
춘천시 동면 하일길 제자교회에서 정해창 목사의 주도로 춘천연탄은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2006년엔 밥상공동체인 ‘하늘밥상’이 설립된다.
2002년 성탄 전야, 좁은 골목길을 걸었던 한 사람 정해 창 목사.
그는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한 편의 시를 썼다.
작은 물방울이 큰 바다를 이루듯
연탄 한 장에 담긴 작은 사랑을 모아
온 세상 아름답게 만들고 싶습니다
- 정해창 ‘작은 사랑 아름다운 세상’ 시 일부
정해창 목사는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한다.
내 안의 반경에 누가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가.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그날 그 노인들에게서 보았습니다
- 행동하는 섬김이, 고로 그는 존재한다
정해창 목사는 말로만 하는 성직자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섬김이라 부른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뜻이다. 그가 하 는 일은 아주 작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을 한다.
사실 아주 작은 일은 큰일보다 실천하기가 어렵지 않다. 사랑을 마음속에 품기만 한다면.
내 주변에 누가 내 섬김을 받는가를 살피는 일, 나와 함께 실천할 이가 누구인가를 아는 일, 그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다. 20여 년의 세월.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탄을 골목길로 날랐다.
구들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 져 올 때, 그저 예수님께 고맙고, 어른들께 고맙고,
함께 두 손을 잡아준 ‘아름다운 사람들’이 고마웠다.
3.65kg 연탄 한 장의 무게만큼 세상은 행복의 무게가 더해졌다.
가난한 이의 체온이 36.5도로 유지될 때, 세상은 그만큼 따뜻해진다는 걸 알았다.
비탈지고 좁은 골목길을 오르다 보니 연탄이 쏟아질 때 가 있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나와 빗자루나 삽을 들 2022년 1월호 37고 치워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서러워서 혼자 부서진 연탄을 주워 담았다.
한겨울 노인들은 거동이 불편해 바깥 출입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섬김이를 도와줄 사람이 골목길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말라. 너는 스스로를 섬김 이라 하지 않느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자문자답은 정해창 섬김이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메아리쳤다.
- 작은 자의 작은 나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마더 테레사 수녀의 ‘한 번에 한 사람’이란 글귀를 정해창 목사는 마음속에 섬기고 있다.
나는 결코 대중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한 사람만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한 번에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만일 그때 그 한 사람을 잡지 않았다면
난 4만2000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경제학자 슈마허의 말처럼 작은 것이 아름답지 않는가.
연탄은 그런 철학이 담겨 있다. 이제 연탄은 정해창 섬김이의 신앙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탄신학’이란 말을 쓴다.
연탄 한 장의 불꽃에 사랑함과 따뜻함, 그리고 고마움이 담겨 있다.
연탄 한 장에 지고한 순수함이 담겨 있고,
연탄 한 장에 서로를 포근히 감싸는 포옹과 무한한 생명이 담겨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처럼 우리는 자신을 향해 되묻는다.
세상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섬기고 세상의 눈물과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
검은 복장을 하고, 검은 얼굴의 사람이 되어 목회를 할때, 신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예배 볼 때만이라도 쉬셔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노인들은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를 않는다. 멀리 떨어진 원창고개 너머 할머니,
사북면 할아버지의 다급한 전화를 외면할 수 없다.
거기에 예수님이 추위에 떨고 계신다. 그래서 정해창 목사는 검은 옷을 벗을 수가 없다
춘천연탄은행의 정해창 목사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사진 왼쪽부터). 이런 골목길은 사람들의 노력 봉사가 필요하다.
이번 겨울 춘천연탄은행을 통해 봉사를 한 아이들과 방송인 김제동.
-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상을 받아야지요
내가 누구에겐가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내가 누구에겐가 상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상은 잘난 사람, 뛰어난 사람, 실적을 올린 사람만 받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평생에 상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늙은 사람들이 내 이웃 에 있다는 걸 정해창 섬김이는 깨달았다.
매해 12월 30일은 상을 받는 날이다. 서로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날이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는 날이다.
무료급식을 받던 노인이 어쩌다 눈이 오는 날, 골목길 을 치우고 나니,
영감님 상 받으셔요. 그 상이 ‘어쩌다길목 청소상’이다.
우연히 버스에서 돈을 주워 파출소에 맡겼더니, ‘돈주 워준상’. 수술하고 난 다음,
방귀가 안 나와 고생하다가 여섯 시간 만에 방귀를 뀐 노인에게 주는 상이 ‘방귀뽕상’….
이렇게 해마다 상을 받으니, 연탄골목은 웃음꽃이 피기 시작한다. 상의 가짓수가 무려 140여 개나 된다.
비록 가난하지만, 골목길은 마음이 넉넉한 어른들이 살 고 있다.
검은 성자 정해창 섬김이는 연탄 한 장의 행복에 늘 감사해하는 사람이다.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 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 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