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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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69

2021.10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 ㉒
내 젊은 날의 골목풍경, 석사동

50년도 더 되었다. 나는 젊은 날을 석사동 골목에서 살았었다.

나는 시골 인제에서 춘천교육대학으로 진학했다.

시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고, 키가 작고 빼빼 말라 있었다. 나는 돈이 없었기에 외상으로 어느 하숙집에 들어갔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겨우 방 하나를 빌려 입학시험을 치렀다.

간신히 춘천교육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나는 1학년을 그 하숙집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2년제 대학은 짧았다.

입생으로 입학하자마자 여름, 가을, 겨울이 왔고, 이듬해 곧 졸업반이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 초임발령을 받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나는 2년제를 무려 5년이나 다녔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한 학생이 있었다.

키는 나보다 좀 컸지만, 그도 빼빼 마른 학생이었다.

그도 인제 출신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도 5년을 더 다녔다. 아니 그는 7년이라고 우겼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방 하나를 빌려 자취 생활을 했다. 철조망이 쳐진 교대 울타리 옆이었다. 우린 철조망 한 곳을 터놓았다.

리고 자유롭게 철조망을 넘어 학교 강의실과 미술실, 운동장으로 가곤 했다.

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철조망을 넘어왔다. 철조망을 우린 휴전선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학교가 북한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운동장에선 군복을 입은 학생들이 RNTC 군사훈련을 하곤 했다.

언제 저들이 휴전선을 넘어 남침할지 모른다며 우린 낄낄거렸다.


물론 휴전선 비밀통로는 몇몇 학생에게 알려져 그들도 남파인지 북파인지 간첩 역할을 감행했다.

그들은 철조망 비밀 통로를 개구멍이라 했고, 저녁만 되면 술과 담배를 지참하고 우리 자취방으로 왔다.

우린 그들과 늘 문학과 철학, 그림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당시 신춘문예 두 번, 중앙문예지에 한 번, 연속으로 당선한 학생 시인이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말재주꾼이었고 글솜씨도 뛰어났다.

방세가 여러 달 밀려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원고지를 꺼내어 시를 썼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말했다.

야, 또 해? 시는 상금이 많지 않아. 내가 쓰면 안 될까?

그래서 그는 밤을 새워 원고지 칸에다 모를 심듯 글자를 심었다.

하룻밤에 쓴 그의 원고는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의 이름 석 자와 단편소설 당선작이 신문 양면을 꽉 채웠다. 이외수 <견습어린이들>.

공교롭게도 우리가 터놓은 개구멍 철조망이,

아니 휴전선이 지금은 교육대학을 넘나드는 외곽 출입구가 되어 있었다.

그곳 자취방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내와 함께 외곽 출입구를 통해 교육대학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녹색 잔디가 푸르게 깔린 조각공원이 펼쳐졌다.



비를 맞으며 잔디를 기어가는 달팽이가 보였다. 조각가 백윤기 작품이었다.

군데군데 조각품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특히 나와 아내의 눈길을 끈 조각품은 할아버지와 네 마리의 염소였다.

수염이 염소처럼 뾰족한 할아버지는 호리호리하게 키가 컸다. 아, 저분은 리터엉 할아버지를 똑 닮았구나.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 교육대학엔 큰 키의 호리호리한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그는 <리터엉 할아버지>를 쓴 동화 작가였고, 춘천교육대학 학장이었다.

최태호 학장님은 늘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학생들은 최태호 학장님을 리터엉 할아버지라고 불렀다.(리터엉을 반대로 읽으면 엉터리가 된다.)

그래서일까. 춘천교육대학은 글 잘 쓰는 학생 문사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를 쓰다가 나중에 소설가가 된 한수산은 1학년을 마치고 이듬해 경희대 영문과로 진학했고,

후배인 시인 최승호는 졸업을 무사히 마치고 정선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얼마 후 그도 선생을 그만두었다. 그는 서울로 가 출판사 편집장을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학생이 시인과 동시인, 소설가와 동화작가가 되었다.

교사와 더불어 훌륭한 문인을 많이 배출하는 교육대학이란 별칭은 그래서 얻어졌다.


지금은 4년제 대학교가 되었고,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교문에서 도서관까지의 길 양옆은 은백양 나무로 늘 반짝였다.

그러나 벌레가 많이 낀다고 하여 은백양 나무는 모두 뽑혀 나갔고, 대신 은행나무 길이 들어섰다.

아무래도 은백양 나무 길이 좋았어.

나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와, 한동안 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문 큰길 건너편으로 여우 소극장이 보인다. 자동차들이 부슬비를 맞으며 느리게 지나간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엔 지하 소극장은 아이들로 붐볐다. 인형극이 매일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무대와 객석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꽃집 옆 석사초등학교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옛날 좁았던 골목길은 탁 트여 있었다.

마침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노란 학원차들이 여기저기 대기하고 있다가 자신들의 수강생을 불러 모으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랑, 빨강, 파랑 우산들이 어지러이 뒤엉켰다. 한산했던 문방구 가게는 아이들로 시끄러워졌다.

초록 우산처럼 호박잎이 시멘트 담을 넘는 골목길로 아이 둘이 나란히 우산도 없이 걸어간다.

이런 부슬비면 그냥 걸어도 좋을 듯 싶은 모양새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한 남자아이가 빨간 책가방을 헐렁하게 메고 흰 비닐우산을 전봇대에 대본다.

한번 해볼래? 하는 듯이. 마치 검객의 시늉이다.

길가 옥수수는 이미 말라 있고,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 건물 2층 창가를 넘보고 있다.

줄콩과 작두콩이 자라는 쇠울타리를 지나면 강원도시개발공사가 불쑥 등장한다.

그리고 현대식 건물 틈새로 낡은 기와집 한 채가 거북등처럼 납작 엎드려 있다.

그 기와집에 잇닿은 골목은 매우 비좁다. 우산 든 아이 둘이 세로로 줄 서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골목을 벗어나자 하천이 나타난다. 천변엔 고구마밭과 채마밭들이 저마다 구획을 지어 이웃끼리 마주하고 있다.

아마 공유지이거나 나대지일 듯싶다. 고추가 어른 키만큼 자랐다.

쇠막대로 경계를 하고 나일론 줄이 죽 이어진 길 양쪽으로 정성스레 가꾼 채소와 파들이 자란다.



하천 모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데 그 물은 자연스레 다리 밑까지 이어진다.

노란 금계국 꽃밭을 지나면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온통 붉다.

맨드라미 꽃밭에 자리공 하나가 빨간 줄기를 내밀며 까만 열매를 물었다.

그게 마치 ‘나도 붉다’라는 허세의 모양새다.

하지만 수탉의 볏 같은 그 붉디붉은 계관화에 어찌 비할 수 있으랴.

돌다리를 건너 하류로 내려갔다. 하천 가장자리는 온통 고마리가 뒤덮여 있다.

후하천교라 이름한 시멘트 다리에 다다른다. 자전거와 사람이 다니는 후하천교 밑은 어둡다.

강우 시엔 출입이 금지된다는 팻말이 붙어 있다.

보행자의 길과 하천 흐르는 길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굴처럼 뚫린 후하천 길은 7, 80년대 극장 간판 그림들로 나열되어 있다.

맨발의 청춘, 벤허, 고교 얄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봇태권V, E.T 등….

후하천 길인 통로를 빠져나오자 물길은 공지천에 닿아 큰 물길과 합류한다.

이제는 건물들과 아파트들이 들어선 공지천변은 사람들로 붐빈다.

천변 산책길은 시민들에게 여유와 건강과 행복을 주는 길이다.

눈에 익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눈짓 웃음이 평화롭다.

예전엔 이 하천에서 여름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대룡산에서 내려오는 찬물에 몸을 담갔다.

그만큼 물이 맑았고,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하천은 수풀과 다리를 흘러 소양호로 흘러내린다.

다리 밑에선 버스킹 공연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림과 시화전이 열리기도 한다.

다리 밑은 이제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공지천은 삶의 가치를 누리는 길이 되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석사천엔 가랑비가 수면을 방울방울 적시며 내리고 있다.